1960~70년대 한국 TV 코미디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웃으면 복이와요’였다. 배삼룡·구봉서·서영춘 1세대 트로이카가 웃음보따리를 이끌었다.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들은 특유의 바보, 어설픈 막둥이, 살살이 캐릭터로 고단한 국민들의 시름을 덜었다. 과장된 몸짓, 분장과 구수한 만담이 코미디의 전부처럼 알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1974년 ‘살짜기 웃어예’가 등장했다.
▶임성훈 최미나가 진행한 이 프로그램엔 대학가 생맥주 통기타 클럽에서 활동하던 ‘재야 입담꾼’들이 출연했다. 총알과 콩알의 언어 유희를 이용한 참새 시리즈가 방송에 처음 소개된 것도 이때다. 코미디언이 아니라 방송 작가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던 전유성이 그 뒤에 있었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슬랩스틱뿐 아니라 풍자·조롱과 재치의 언어로도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의 서라벌예대 후배인 ‘배추 머리’ 김병조도 이 프로그램으로 데뷔했다.
▶그 시절엔 코미디언을 좋아하면서도 직업인으로는 하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PC통신이 유행했을 때 전유성의 아이디는 ‘gagman1’이었다. 개그맨 1호라는 의미였다. 서양에선 널리 쓰이지는 않는 ‘개그’란 말이 재담이나 익살이란 뜻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전유성은 개그란 말에 전문적인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담았다고 한다. ‘개그콘서트’의 설계자로도 불린다. 그는 개그를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관객 대면형 라이브 코미디로 일단 검증한 뒤 TV 정규 프로그램에 올렸다.
▶미국에서 개그는 단발성 익살, 농담 하나를 특정할 때 쓴다. 그래서 희극 장르는 개그가 아니라 코미디라 부르고, 직업도 개그맨이 아니라 코미디언이다. 코미디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 코모이디아(komoidia)에서 왔다. 떠들썩한 잔치(코모스)와 노래(오이데)의 결합이다. 아리스토파네스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희극에는 과장된 슬랩스틱과 익살스러운 대화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개그맨과 코미디언을 구별하고 차별하던 시절은 끝난 듯하다. 이 직업의 사회적 지위와 몸값, 인기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 메인 MC는 대부분 희극인이고, 단순히 웃기는 역할을 넘어 출연자를 이끌고 흐름을 조율한다. 광대가 아니라 재능 있는 크리에이터들이다. 전유성은 결혼하는 자신의 딸 청첩장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비가 와도 합니다.” 코미디건 개그건, 중요한 건 파격적인 자유로움과 독창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