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어느 날 김성민 전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전직 외교관 등 탈북민 지인들과 식사 중이었다. TV에서 남북이 상호 비방 금지 차원에서 대북·대남 방송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국 정부가 하지 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참석자들 눈은 일제히 김 전 대표를 향했다. 당시 그는 KBS ‘남북의 창’ 등에 출연해 방송을 좀 알 때였다.
▶그렇게 그해 4월 첫 대북 방송을 날렸다. 그 후 매일 2시간씩, 365일,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방송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이 김 전 대표의 자부심이었다. 친북 단체가 방송국 앞에 몰려와 시위를 했지만 그는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을 보니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방송을 모델로 많은 대북 매체들이 탄생했다.
▶북한군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인 그는 1995년 탈북했다. 1999년 입국한 그는 온화한 성격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탈북민들의 맏형 노릇을 했다. 그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탈북민은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탈북자동지회에서 황장엽 전 비서를 보좌하다 회장까지 맡았다. 황 전 비서가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각별한 정을 보인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 전 대표가 암 투병 끝에 12일 세상을 떠났다. 63세로 요즘엔 한창 활동할 나이다. 고인은 지난해 암이 재발해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암덩어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은 두만강 변 등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까지 묻었고, 중국은 안면 인식 AI로 탈북자들을 속속 체포하는 상황이다. 탈북자 수가 연 200명 안팎으로 줄었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고 이달엔 대북 심리전 라디오 방송인 ‘자유의 소리’ 송출도 중단했다. 대북 방송 지원이 끊기는 상황도 암담했을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산 지원을 끊으면서 북한에 외부 소식을 전해온 미국의소리(VOA), 자유아시아라디오(RFA)도 송출 중단 위기를 맞았다.
▶그는 북한 땅에 자유를 전파하려던 북한 민주화 운동가였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자유’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분파적·폭력적인 방식은 국민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배제했다. 일시적이겠지만 그가 꿈꾼 세상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부음이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