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이 정점이던 1986년, 정부는 수출 주역인 기능공들의 땀과 기술에 존중을 담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명장(名匠)부’를 신설했다. 첫해 명장부는 3개 직종에서 진행됐는데, 용접 분야 박동수(당시 현대중공업)씨만 최종 통과했다. 국내 1호 명장으로, 한국 산업계에 명장(名匠) 시대를 연 순간이다. 당시 결승전은 성질·두께·녹는점이 각각 다른 두 종류의 금속을 잇는 기술 경연이었는데, 박 명인은 단 한 번 작업으로 완벽에 가까운 용접 비드(bead·용접 흔적)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장인 정신의 계승은 지금도 이어진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매년 22개 분야 97개 직종에서 선정하는데, 올해로 누적 710명이 선정됐다. 7대째 가업을 잇는 이학천 도예 명장, 고졸 출신 명장으로 대우중공업 전무까지 올라 실력이 학력을 이긴다는 실증을 보여준 김규환 기계조립 명장, 한복의 세계화를 이끈 서정민 명장 등이 그 명맥의 주역들이다.
▶서양에서 장인 정신은 그 자체로 브랜드다. 3대에 걸쳐 시계의 역사를 쓰는 ‘브레게’ 가문, 300년 넘게 최고의 바이올린을 만든 ‘스트라디바리’ 가문 등 명기(名器)의 대명사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들이 대를 잇는 이유는 기술의 진수인 장인 정신은 오랜 시간 축적이 필수적이고 그래서 결코 책이나 영상으로 전수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에서 정부가 장인을 관리하는 것도 그만큼 명장의 대 잇기가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 일본의 ‘현대 명공(名工)’, 프랑스의 ‘MOF’(프랑스 최고의 장인) 등이 대표적이다.
▶장인 전통이 끊겼을 때 어떤 공백이 생기는지는 지금 미국이 보여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제조업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공장이 문을 닫으며 ‘러스트 벨트’가 생겨났고, 장인의 계보도 함께 끊겼다. 이제 와서 첨단 공장을 지으려 해도 숙련공이 없어 애를 먹고, 자부심을 잃은 노동자들의 상실감이 정치적 구호로 폭발했다. 미국 내 ‘장인의 붕괴’가 세계 정치를 흔들고, 그 여파가 한국까지 미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에 ‘부자(父子) 명장’이 탄생했다. HD현대중공업 소속으로 2004년 선정된 고윤열 명장(67)에 이어 아들 고민철(43) 명장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부자 명장’은 한국 제조업에서 처음이다. 장인에겐 단순 기술을 넘는 혼이 있다. 한 나라 제조업의 저력이 그 안에 있다. 장인의 역사가 이 땅에서 영원하길 바라며 그들의 빛나는 손끝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