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한국 영화에서 ‘로맨스그레이’가 처음 제목으로 등장한 건 1963년이다. 신상옥 감독이 아내 최은희와 당대 최고 스타 김승호(김희라 부친)를 캐스팅했고, 중년의 대학교수·기업체 사장이 술집 여자를 소실로 두고 저물어가는 인생의 아쉬움을 달랜다는 설정이었다. 이를 안 본처들이 연대해 남편의 비밀 아지트로 쳐들어가고, 각자 자신의 탈선과 악행을 반성하는 것으로 끝난다. 60년 전 ‘로맨스그레이’는 그런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다.

▶국어사전은 ‘로맨스그레이’를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신사, 혹은 그들의 중후한 사랑으로 정의하고 있다. 주체가 남성인 것이다. 하지만 한 세대가 흐르면 분위기가 바뀐다. 가수 심수봉이 1994년에 발표한 ‘로맨스그레이’는 이렇게 노래한다. ‘노을이 비춰오는 바다 위 조용히 미소 짓는 두 사람/ 마주 잡은 노부부의 손에 건네진 사랑 편지 하나/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 때도 황혼이었지.’ 중년 남성의 불륜을 사랑으로 분칠하는 시대착오는 사라졌다.

▶다시 한 세대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엊그제 서울 서초동에서는 전문 데이트 업체 주선으로 5060세대 13쌍이 마주 앉아 ‘릴레이 소개팅’을 했다. 청년 세대의 요즘 유행이라는데, 10분 간격으로 사람을 바꿔가며 13번의 짧은 데이트를 했다는 것이다. 한자리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이성을 만나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이뿐만 아니다. 온라인에서 이성을 찾는 사업도 급속도로 커지면서, 한 시니어 전문 데이트 앱은 가입자만 10만명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황혼 이혼은 늘어나고 재혼 연령은 높아지고 있다.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참기보다 개인의 행복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또 100세 시대를 맞아 건강한 중장년도 급증한 까닭이다. 1982년에는 평균 재혼 연령이 남성 38.9세·여성 33.7세였지만, 작년엔 각각 51.6세·47.1세였다. 남녀 불문, 세련된 자기 표현과 진정성 있는 사랑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 넷플릭스 영화 중에 ‘밤에 우리 영혼은’이라는 작품이 있다. 70대의 로버트 레드퍼드와 제인 폰다가 주인공이다. 각각 남편과 아내를 잃고 홀로 사는 이웃인데, 제인이 먼저 로버트를 찾아간다. “우리 같이 잘래요?” 육체적 사랑을 나누자는 제안이라기보다 무서울 만큼 외로운 밤을 함께 보내며 위로받고 싶다는 뜻으로 들린다. 노년의 외로움은 불치라고 한다. ‘로맨스그레이’에 따뜻한 응원을 보내는 시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