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8월 초에 런던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쾌적한 공항과 달리 지하철을 타자마자 숨이 막혔다. 에어컨 고장이냐고 옆자리 청년에게 물어보자 그가 이마의 땀을 훔친다. “에어컨은 사치품 아닌가요? 런던 지하철엔 원래 에어컨이 없어요.” 확인해 보니 지하 터널이 좁고 깊어 열 배출과 환기가 어려워 대부분 구간에서 에어컨 설치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가정집에도 에어컨이 없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지금도 영국 주택의 에어컨 설치 비율은 20%를 넘지 않는다.

▶작년 여름 파리 올림픽의 구호 중 하나는 ‘에어컨 없는 올림픽’이었다. 환경이 명분이다. 파리 시장은 “선수들의 편안함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생존을 더 많이 고민한다”고 했다. 하지만 40도 넘는 폭염으로 선수들이 쓰러지자, 미국·호주 등 부유한 국가들은 자체 비용을 들여 선수들 숙소에 휴대용 에어컨을 들여왔다. 가난한 나라들은 ‘불평등’이라고 항의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에어컨을 ‘에너지 낭비이자 미국식 사치품’으로 여겼다. 환경을 내세우며 에어컨을 ‘기후 악당’ 취급한 것이다. 실제로는 온화하고 습기가 적은 지역이 많아 여름에도 그다지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았던 게 근본 이유다. 이탈리아처럼 전기료가 비싼 나라에선 경제적 이유도 한몫했다. 지금도 영국의 건축 규정은 에어컨을 설치하기 전에 창문 배치 개선 등 수동식 냉방 방안을 먼저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폭염이 유럽에 잦아지면서 발생했다. 지난해 프랑스에서만 열사병 등으로 5000명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그런데도 에어컨 설치를 두고 유럽은 여전히 좌우가 싸운다. 프랑스 국민연합이 최근 ‘공공기관 에어컨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걸자 녹색당은 도시 녹지 확대와 건물 단열 개선이 먼저라고 반대했다. 프랑스 좌파 신문은 “에어컨은 환경 괴물”이라고 했다. 한국의 한 유명 철학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냉장고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로 비난한 적이 있다. 냉장고만 없다면 사람들이 식품을 적당량만 살 것이고, 그러면 생태·환경·공동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한여름에 그렇게 한 달만 밥 해 먹으며 살아보라”는 주부들의 말에 그는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올여름 에어컨 고장과 수리 지연으로 열흘 동안 에어컨 없이 살아봤다. 환경 괴물도 기후 악당도 다 멋진 말이다. 하지만 35도 넘는 폭염은 그런 말들을 다 부질없는 언어유희로 만든다. ‘환경’이나 ‘기후’도 도가 넘으면 괴물, 악당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