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사과의 주체와 배경에 따라 다양한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2030세대 사이에선 걸그룹 에스파의 리더 카리나의 “연애해서 죄송합니다”가 화제였다. 남자 배우와 열애설이 불거진 뒤 일부 극성 팬들이 “우리가 네게 주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냐” “사과하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 것”이라며 트럭 전광판 시위에 나섰고, 카리나는 자필 사과문을 썼다. 걸그룹 수익 모델은 팬덤 비즈니스임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는데, 사과문에 수만 개 댓글이 붙으며 K팝 문화에 대한 국제적 논란도 촉발됐다.
▶한국 사회의 ‘웃픈(웃기면서 슬픈)’ 현실을 담은 ‘죄송’도 있다. 국립국어원 개방형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형용사 “문송합니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 경우다. 취업 시장에서 연패하고 있는 문과 출신들의 자학적 농담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물론 작년 10월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금일부로 ‘문송합니다’ 사용 금지”라는 발랄한 반격도 등장했다.
▶4050 이상 세대는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1940~2002)의 ‘죄송’을 잊을 수 없다. 특유의 더듬거리는 말투로 슬쩍 던지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말이다. 물론 이 경우는 공식 사과가 아니라 개그적 장치다. 특정 인물이나 타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자기 희화화를 통한 유머였고, 이주일 특유의 인간적 매력과 입담이 ‘못생겨서 죄송’을 시대의 유행어로 만들었다.
▶또 하나의 희한한 ‘죄송’이 추가됐다. 과거의 전방위 막말로 논란이 된 최동석 신임 인사혁신처장이 생방송 중인 29일 국무회의에서 “유명해져서 죄송합니다”라는 사과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이전에 최 처장이 “정치판에 얼씬도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비난한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과 “민주당을 다 말아먹고 있다”고 공격했던 우상호 정무수석도 국무회의에 함께했지만, 정작 당사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그의 과거 발언은 “민족의 커다란 축복”이었다.
▶ 최 처장은 이주일식 ‘죄송합니다’로 논란을 가라앉히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실수나 약점을 유머로 승화하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최 처장의 ‘죄송’은 불을 더 키우는 모양새다. 논란의 원인에 대한 사과는 빼고, 논란의 결과인 자신의 유명세에 초점을 맞춘 탓이다. 여당에서조차 부적절한 사과라고 비판하자, 그는 다시 서면 사과문을 발표했다. ‘죄송’ 발언으로 그가 좀 더 유명해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