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9월 시작된 나치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포위는 900일 이상 이어졌다. 식량 공급은 끊겼고,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 와중에 과학자들이 목숨 걸고 지킨 연구소가 있다. 러시아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인류의 식량 자원을 보존하겠다며 수천 종의 작물 씨앗을 수집해 만든 바빌로프 시드뱅크(종자 은행)였다. 12명 이상 연구원들이 굶어 죽었지만 보관된 감자나 과일 등은 단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라며 밤낮으로 관리했다.
▶단순 보관 차원을 넘어 한번 저장하면 거의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시드 볼트(Seed Vault·종자금고)도 있다. 노르웨이가 스피츠베르겐섬 동토층에 지은 스발바르 시드볼트다. 자연재해나 기후변화, 전염병·전쟁 등으로 식량 자원이 고갈될 경우를 대비한 이른바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의 현장이다. 현재 130만 개 정도 종자 샘플이 보관되어 있다. 2008년 가동된 이후 시리아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탁국에서 종자가 사라져 이를 복원하려 딱 두 번 금고의 문을 열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스발바르 시드볼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설을 운영 중이다. 경북 봉화군의 해발 600m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시드볼트다. 지하 46m 깊이에 6.9 규모 지진이나 핵폭발에도 견디게 60cm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와 3중 철판 구조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국가보안시설로 지정돼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스발바르가 주로 작물 종자를 보관한다면 한국은 야생 식물 중심이다.
▶종자 보관소는 엄청난 경제적 미래 가치도 있다. 주목에서 항암제 텍솔이, 버드나무에서 아스피린이 나왔다. 훗날 과학 발달로 어떤 천연 원료의 이런 효용성을 알았을 때 그 종자가 소멸됐다면 그것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 유적지 발굴 과정에서 700여 년 전 고려 시대 연꽃 씨앗이 발견됐다. 이 씨앗을 발아시켜 ‘아라홍련’을 700년 만에 꽃 피웠다. 역시 백두대간 시드볼트에 보관돼 있다. 현재 보관된 것은 한국을 포함해 190국에서 온 6109종, 28만1248점이다.
▶민둥산 천지 한국이 이렇게 푸르게 된 것은 국제사회의 도움도 있었다. 산림청은 우리도 인류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2009년부터 백두대간 시드볼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앞으로 전 세계 야생종자 약 35만 종 중 2050년까지 30%를 저장할 계획이다. 현재는 1.7% 수준이다. 한국이 만드는 노아의 방주라 불릴 만하다. 84명 연구원들의 노고에 감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