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2월 11일, 남아공 케이프타운 시청에 인종 분리 정책 반대 운동 상징인 넬슨 만델라가 섰다.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막 풀려난 그를 환영하기 위한 인파가 시청 앞을 가득 메웠다. 연설하는 만델라 옆에 수염을 짙게 기른 한 청년이 서서 내내 마이크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때 38세였던 청년은 지금 남아공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다.
▶1990년 당시 남아공에서 가장 크고 힘 있는 노동조합은 전국광부노조였고, 라마포사는 그 노조를 조직한 운동가였다. 그는 “말수는 적지만 리더십 있다”는 평을 들으며 운동가들의 신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만델라 석방 범국민환영위원회 의장을 맡게 됐다. 만델라는 석방 후 라마포사에게 인종 분리 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백인 정권과의 협상을 맡겼고,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라마포사는 헌법을 만드는 제헌회의 의장이 됐다. 라마포사를 만델라의 ‘후계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라마포사는 사업가가 돼 큰 부자가 됐다. 라마포사가 정치로 돌아온 것은 성공한 기업가가 된 후였다. 2014~2018년 제이컵 주마 정권의 부통령을 지낸 그는 주마 전 대통령이 2018년 비리 혐의로 사임한 후 마침내 남아공 대통령이 됐다.
▶라마포사는 국제사회에선 무명에 가까웠으나 트럼프가 그를 갑자기 유명하게 만들어줬다. 트럼프는 21일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찾은 라마포사를 앉혀 놓고 돌연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인종 학살(제노사이드)을 당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를 모욕할 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도 라마포사 공격에 끼어들었다.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공개한 사진과 영상 중에는 남아공이 아닌 콩고에서 찍힌 사진도 있었다. 남아공 출신 골프 스타 어니 엘스와 레티프 구센 등을 배석시키며 회담을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려던 라마포사는 예상 못 한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그러나 라마포사는 젤렌스키와는 달리 끝까지 흥분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며 점잖게 응수했다. 외신들은 “쿨한 대응”이었다고 호평했다. 예의를 모르는 트럼프에게 대처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라마포사는 일곱 살의 나이에 백인 군인의 발에 차여 도랑에 떨어지는 경험까지 한 사람이다. 11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고문도 받았다. 그런 그가 트럼프로부터 ‘백인 차별 정권’ 공격을 받다니 아이러니하다. 이날의 압권은 라마포사의 한마디였다. “트럼프 대통령님, 저는 당신께 드릴 비행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