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귀했던 시절, 박치기왕 김일과 꿀밤왕 여건부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텔레비전 있는 집에 아이들이 모였다. 그러나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텔레비전 사 달라는 투정이 이어지자 어머니는 “저건 다 쇼야”라고 폭탄 발언을 했다. 박치기왕 김일 머리에 흐르던 피, 마스크를 벗기려 하면 기절했다가도 일어나던 ‘타이거 마스크’ 그게 가짜라니 어린 마음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협정 비준으로 긴박했던 1965년 8월 11일 밤, 청와대에서 김일과 일본 선수의 레슬링 중계를 봤다. 김일이 승리하자 박정희는 전화를 걸어 “김일 선수, 나 대통령이야. 참 잘 싸웠어”라고 했다. 김일의 초대 후원회장은 김종필이었다. 경호실 근무 시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각하, 저거 다 쇼인데 왜 보시느냐”고 했다가 질책을 들었다. 프로레슬링 인기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식어갔다. 전두환 집권 이후였다.
▶미국 최대 프로 레슬링 단체인 WWE에서 E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다. 처음부터 각본대로 진행되는 쇼임을 알리고 있지만, WWE는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 있는 선수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연 매출이 2조원이다. 창업자 빈스 맥맨과 아내 린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절친이자 후원자다. 트럼프는 2007년 WWE 무대에 직접 올랐다. 트럼프는 린다 맥맨을 1기 때 중소기업청장에 지명하더니, 2기 집권 때는 교육부장관을 시켰다.
▶프로레슬링에서 해설자 역할은 독보적이다. 일본 TV 아사히는 2004년 메인 뉴스 앵커로 프로레슬링 중계로 명성을 날렸던 아나운서를 내세웠다. 그는 무미건조한 일본 뉴스를 레슬링 중계처럼 박진감 있게 진행했다. 그가 진행한 12년간 메인 뉴스 평균 시청률은 13.2%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출연했던 팟캐스트의 진행자 조 로건도 격투기 해설자였다. 그의 팔로어는 1980만명이다.
▶90년대 후반 국정감사장에서 여야 의원 두 명이 멱살을 잡을 듯 큰 소리로 싸웠다. 두 사람은 카메라가 떠나자 “이봐, 아까 진짜처럼 소리 지르데” “소주나 마시자” 하며 국감장을 떠났다. 그런데 이제 정쟁은 주먹이 오가고 피가 튀는 진짜 싸움처럼 변했다. 이런 현실을 보며 때론 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쇠락했던 국내 프로레슬링이 다시 초등학생 사이에서 인기다.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명확한 선악 구도가 인기 요인이라고 한다. “저건 다 쇼야. 악당이 이기는 게 현실”이라고 아이들에게 미리 말해주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