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도중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며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2대에 걸쳐 의료 봉사 활동을 했던 로제타 홀 여사를 언급했다. 윤 대통령 연설에서 함께 언급된 언드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과 달리 로제타 홀은 생소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일러스트=박상훈

▶25세 젊은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가 1890년 제물포항에 발을 디딜 때 어렵고 힘든 삶을 각오하긴 했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이 될 줄은 몰랐다. 1894년 11월, 청일전쟁 격전지였던 평양에 의료봉사 하러 갔다가 남편 윌리엄 홀을 감염병으로 떠나보냈다. 결혼한 지 3년도 안 됐고 아들은 이제 돌인데 배 속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 잠시 귀국해서 낳은 둘째는 딸이었다. 그 딸마저 이질로 잃었다. 남편과 딸을 한국 땅에 묻었다.

▶이후 로제타 여사의 삶은 개인의 불행을 봉사로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교회사 연구가인 박정희의 저서 ‘닥터 로제타 홀’엔 역경 속에 인류애를 꽃피운 그녀의 삶이 기록돼 있다. 로제타는 거듭된 불행을 신앙으로 이겨내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길을 모릅니다. (중략) 비록 이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제 아들 셔우드와 한국에서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다시 일어선 로제타 여사는 남편과 딸 이름으로 기념 병원을 지었다. 여성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광혜여원도 설립했다. 국내 첫 시각장애인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웠고, 한글 기반 점자를 최초로 개발했다. 고려대 의대의 모태가 된 조선의학강습소도 개소했다. 조선 여성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여의사 양성에 힘썼다. 그녀가 미국에 보낸 박에스더는 첫 여성 의료 유학생이자 첫 여의사였다. 1933년 68세 노인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43년간 가난하고 병든 조선인을 돌봤다. 부모처럼 의사가 된 아들 셔우드와 며느리 매리언도 식민지 조선인을 괴롭힌 결핵 퇴치에 앞장섰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는 홀 집안 5명이 안장돼 있다. 1951년 로제타 여사가 별세하며 남편과 딸이 있는 한국 땅에 묻어달라 했고, 1991년 같은 해 세상을 뜬 아들 셔우드 박사 부부도 양화진 묘역에 묻혔다. 셔우드 박사는 “아직도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민국의 지금 모습은 한국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홀 집안의 70년 봉사 덕분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의 연설이 새삼 그 헌신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