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화가 노은님은 전주에서 9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 때 모친을 잃고 아버지마저 사업에 실패하자 스물 넷 되던 1970년 파독(派獨) 간호사·간호조무사 모집 광고를 보고 독일행을 택했다. 그녀가 새 삶을 시작한 함부르크 병원은 험한 뱃일로 다친 선원이 많아 일이 고됐다. 쉬는 날 밖에 나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했다. 온종일 집 안에 박혀 그림만 그렸다. 아파서 결근한 어느 날, 문병차 들른 간호부장이 그녀의 그림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당장 전시회를 열자” 했다.
▶1973년 함부르크 시립외과병원이 마련해 준 전시회 이후 새 인생이 펼쳐졌다. 그림을 본 현지 교수 권유로 미대에 진학했다. 표현주의 일색이던 당시 독일 화단에 고향의 풍경과 새·물고기를 동심 가득 담아 표현한 노은님 화풍은 단숨에 이목을 끌었다.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가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남준·솔 르윗 등 유명 예술가와 초대전을 열었고, 1990년부터 20년간 모교 교수로도 봉직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야근을 도맡아 하며 번 돈을 고향에 보냈다. 1972년 기준, 파독 간호사 1인당 한국 송금액은 451마르크(약 8만1500원)였다. 당시 독일 간호사 월급이 700마르크였으니 절반 이상을 보냈다는 뜻이다. 이국에서 겪는 외로움과 고통은 숨겼다. 노 화백도 “힘들다는 편지를 보내면 가족이 운다는 것을 안 뒤로 돈만 보냈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한 것은 아니다. 광부·간호사 파독은 1963년부터 77년까지 지속됐다. 그곳에서 저마다 새 삶을 개척했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서울에서 막일을 전전하다 독일에 갔다. 광부의 삶을 끝낸 뒤 늦은 학업을 시작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김태우 신영필름 대표도 계약된 3년 근무를 마치고 영화 촬영을 배워 귀국했다. 이후 ‘왕의 남자’ ‘실미도’ 등 제작에 참여했다.
▶지난주 별세한 노은님 화백을 기념하는 미술관 건립이 올 12월 상설전시장 개관을 목표로 경기도 파주에서 추진되고 있다. 노 화백은 생전에 남긴 시화집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중략)/ 자신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당신의 집’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70년, 기적의 역사는 이처럼 세계 어디서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한 노 화백 같은 분들 덕일 것이다. 권 교수와 김 대표는 이미 고인이 됐다. 이런 분들의 삶과 성취를 잊지 않고 남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