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신문 1면에 우크라이나 신병의 뒤통수 사진이 실렸다. 영국에서 훈련받던 중 철모를 썼는데, ‘후회는 없다’ ‘자비도 없다’라고 위아래 두 줄이 쓰여 있었다. 결연하고 비장했다. 후회가 없다는 건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군인으로서의 각오다.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는 건 조국 땅을 침범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러시아군을 결단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실 ‘철모(鐵帽)’가 정확한 말은 아니다. 총알과 파편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군인 머리를 보호하려는 헬멧은 원래 쇠로 만들었다. 그래 철모였다. 창칼로 싸웠던 시대에 투구를 썼던 것이나 비슷하다. 약점을 보완하려고 지난 30~40년 사이에 금속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하고, 가벼운 합성수지가 여럿 개발됐다. 플라스틱, 나일론, 강화섬유를 이용해 방호력이 뛰어난 헬멧을 만들고 있다. 소재를 따지지 말고 그저 방탄모로 부르는 게 낫다.

▶하지만 군용 헬멧의 대명사가 돼버린 ‘철모’의 추억은 한둘이 아니다. 예전엔 철모 안에 애인이나 연예인 사진을 넣어 다녔다. 우리 때는 브룩 실즈, 혜은이 사진이 인기였다. 지휘관들도 알고 있었으나 나무라지 않았다. 행군 중 휴식 시간에 철모를 거꾸로 깔고 앉으면 낚시 의자처럼 제격이었다. 이건 장교들이 보면 혼쭐을 냈다. ‘반합’이란 야외용 식기가 없을 땐 철모에다 물을 끓일 수도 있었다.

▶영국군은 원래 세숫대야라고 낮춰 부르던 ‘브로디 헬멧’을 썼다. 챙이 넓어서 떨어지는 파편을 잘 막아줬다. 프랑스군은 후두부 보호가 뛰어난 ‘아드리안 헬멧’을 사용했다. 미군은 원래 영국제를 카피해 쓰다가 나중에 ‘M1 철모’를 개발했다. 양차 대전 때 독일군 헬멧은 ‘슈탈헬름’이라고 불렀다. 금속 모자라는 뜻인데, 귀까지 덮는 독특한 모양이다. 영화에서 봤듯 나치 독일의 상징물처럼 됐다. 다 구시대 유물이다. 지금은 최첨단 소재와 기능을 갖춘 방탄모가 대부분이다.

▶몇 해 전 철원 화살머리 고지에서는 총알 구멍이 숭숭 뚫린 70년 전 녹슨 철모가 나왔다. 너 나 없이 가슴이 먹먹했을 것이다. 철모는 군기와 전통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한때 한국군은 M1형 ‘겉 헬멧’ 안에 유리섬유(파이버글라스)로 만든 ‘속 헬멧’을 끼워 썼다. 둘이 정확히 들어맞아야 덜그럭거리지 않았다. 똑소리 나게 생활 잘하는 병사를 “일병 하이바(파이버)!”라고 불렀다. “후회도 자비도 없다”는 병사,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고 있을 것 같다.

11일(현지시간) 영국 남부 더링턴 인근에서 열린 우크라이나군 신병 훈련에 참가한 한 신병 방탄모에 '후회도, 자비도 없다'(NO REGRET, NO MERCY)라는 문구가 영문으로 적혀있다. /AFP 연합뉴스

/김광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