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록키4′는 미·소 대결이 한창이던 1985년 만들어졌다. 레이건 미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명명하던 때다. 영화는 소련 권투 선수를 전체주의 체제가 만든 살인 병기로 그렸다. 영화는 그해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조롱했다. 3년도 안 돼 이 평가가 뒤집혔다. 서방 지도자들은 군축과 냉전 해체, 소련의 개혁·개방에 나선 그를 ‘고르비’라 부르며 반겼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그를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이전 지도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던 스탈린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자서전에선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을 길게 고백했다. 아내 라이사 여사가 혈액암으로 죽어가자 “부부싸움 때 내가 심한 말 했다”며 눈물을 흘린 남편이었다.
▶인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군비경쟁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도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소”라고 아내에게 먼저 밝혔다.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옥죄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 냉전 체제 해체 등을 추진한 것이 그 약속의 실천이었다. “누구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러시아 문학”이라 대답하고, 마르크스와 레닌 사상을 “공식 이데올로기가 먹여주는 한 줌 양식”이라 비판하는 최고 지도자를 소련 대중은 낯설어하면서도 반겼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인의 폭음 악습도 개혁하자며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했다가 국민적 분노를 샀다. 개혁·개방에 따른 혼란보다 금주법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보드카 사려는 줄이 1㎞를 넘자 화가 난 이들이 “고르바초프를 죽이자”며 크렘린궁에 갔다가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쪽 줄은 더 길어.” 당시 유행하던 우스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해체하지 않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변혁의 에너지에 휩쓸려 버렸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나쁜 정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스스로 개혁에 착수할 때”라는 ‘토크빌의 딜레마’에 고르바초프가 빠졌다고 했다. ‘통제받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적 시장’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그제 영면에 들었다. 냉전 종식이란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했지만 조국에선 손가락질당하다가 갔다. 그는 동족에게 배척당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모스크바의 예수였을까. 어쨌든 우리에겐 북방 외교의 새 지평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그의 안식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