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세계는 디플레이션(저물가)을 걱정했다. 디플레 선두 국가 일본에선 저성장·저물가가 20년 이상 지속되자 출세와 돈 욕망은 접고, 연애와 소비에 소극적이고 꿈마저 소박한 ‘초식남’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 학계에선 “디플레이션 시대에 적응한 신인류”라고 했다. 세계의 일본화(japanification) 기류에 따라 미국, 유럽에서도 머잖아 초식남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 원유, 곡물가 폭등이 40년 이상 잊혔던 ‘인플레이션 시대’를 재소환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2030세대는 물론이고 4050세대조차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인플레이션 시대를 경험한 바 없어 ‘냉면값 1만3000원’ ‘기름값 5달러’ 앞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커피플레이션, 누들플레이션, 런치플레이션(점심값 공포), 베케플레이션(vacation·휴가비 폭등) 등 각종 신조어가 난무한다. 엊그제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은 신조어 최신 버전에 속한다.

▶인플레이션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 중엔 ‘메뉴 비용’이라는 게 있다. 판매 가격을 고쳐 붙이는 비용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원가 상승 요인 이상으로 가격을 부풀릴 수 있다. 미국 민주당에서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핑계 삼아 상품·서비스 가격을 과도하게 올려 물가난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탐욕 인플레이션을 주장한다. 바이든 대통령도 엑손모빌(정유사)을 콕 집어 “지난해 하느님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고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사실만 보자면 과장된 주장이다.

▶그런데 정유사를 대상으로 횡재세(windfall tax)를 걷겠다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과처럼 품 들이지 않고 얻은 이득이니 초과이윤세를 내라는 것이다. 국민 원성을 정유사로 돌리고 증세 효과까지 얻는 일석이조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영국이 첫 깃발을 들었고,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등이 뒤따르고 있다.

▶미국이 28년 만에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할 정도로 고물가 문제가 심각해졌다. 인플레 악화는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돈을 뿌린 바이든 정부의 실책 탓도 크다. 민주당의 그리드플레이션 주장은 책임 회피를 위한 희생양 만들기 혐의가 짙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신조어”라고 했다. 탐욕이 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정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