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청년 송강호는 제대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극단 문을 두드렸지만 연거푸 세 번 퇴짜를 맞았다. 네 번째 상경에서야 비로소 “연락처를 남기고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 걸려온 첫 전화는 행사가 끝난 무대 철거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다 무대에 섰고, “이게 마지막이 되어선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마침 단역 맡길 배우를 찾던 이창동 감독 눈에 뜨였다.

배우 송강호가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5회 칸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트로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이후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괴물’ ‘기생충’ 등 천만 관객 영화를 네 편 찍은 배우는 송강호가 유일하다. 그가 주연한 영화에 든 누적 관객도 1억명에 이른다. 송강호를 영화팬 뇌리에 처음 각인시킨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1997년 영화 ‘초록 물고기’다. 남자 옷을 홀딱 벗기고 라이터로 상대 배우의 체모를 태우며 괴롭히는 깡패 역할이었다. 유튜브에 그 장면이 지금도 돌아다닌다. 제목이 ‘이게 깡패 연기자야? 진짜 깡패야?’다. 송강호는 그때 이미 연기의 신(神)이었다.

▶송강호를 대중의 기억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 것은 같은 해 나온 ‘넘버3′의 여관방 장면이다. 졸개들 무릎을 꿇리고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현정화처럼 헝그리 정신을 가지라”고 일장연설 했다가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고 지적당한 그 장면이다.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말까지 더듬는 연기는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그가 외친 “내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야!”는 그해 영화계 최고 유행어가 됐다.

▶송강호가 칸에서 최우수 남자 배우 상을 거머쥐었다. 같은 작품에 황금종려상과 배우상을 동시에 주지 않는 칸은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줄 당시, 그 작품에 출연한 송강호에게 배우상을 줄지를 두고 고민했었다. 1984년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가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 선정되기 전까지 한국 영화는 변방 신세였다. 영화의 중심을 향한 장정은 여배우들이 먼저 시작했다. 강수연과 전도연이 베네치아와 칸의 여주인공이 됐고, 지난해엔 윤여정이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칸에서 감독·배우 상을 동시에 배출하는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영화 1류 국가다. 세계 영화인들이 우리와 함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송강호에게 주연상을 안긴 영화 ‘브로커’만 해도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들었고,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선 중국 출신 탕웨이가 열연했다. 이탈리아 감독이 만든 영화에 독일·프랑스 배우가 출연하는 유럽 세트장 풍경이 어느덧 우리 모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