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이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진출한 이래 지금껏 14명의 한국인 선수가 EPL 무대를 누볐다. 이들은 살인 태클보다 무서운 인종차별에 한결같이 시달렸다. 박지성의 응원가는 일명 ‘개고기 송’으로 현지 팬들은 “박~ 너희 나라는 개를 먹는다지” 따위의 노래를 응원이랍시고 불렀다.
▶기성용이 드리블하면 관중석에서 원숭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김보경은 감독에게서 “빌어먹을 동양인” 소리를 들었다. 일본 선수에겐 “후쿠시마”를 연호하는 관중도 있었다. 아시아가 지구 육지의 30%를 차지하며 세계 인구의 약 60%(47억명)가 사는 가장 큰 대륙이지만, 세계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미미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손흥민(토트넘)이 아시아 선수 최초로 EPL 득점왕(23골)에 등극했다. 세계 축구 역사를 다시 쓴 쾌거다. 유럽 5대 리그(EPL,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프랑스 리그1) 통틀어 아시아 출신 득점왕은 손흥민이 최초이고, 아시아 선수가 한 시즌 20골을 넘긴 것도 그가 처음이다. 그는 최종전에서 동료들의 전폭적인 패스 지원을 받으며 후반 두 골을 몰아쳤다. 전반 무득점으로 풀이 죽은 그에게 동료들은 “쏘니, 너는 득점왕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명심해” 등의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며 ‘득점왕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축구는 11명이 함께 뛰는 팀 경기다. 패스를 못 받으면 골 기회가 없다. 손흥민의 이번 업적이 혼자 잘하면 1등 하는 개인 종목에서의 성취와 차원이 다른 이유다. 토트넘에서 손흥민은 호날두·음바페 등 각 팀의 간판스타가 차지하는 ‘7번’을 달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 해리 케인과 ‘축구장 부부’로 불리는 입지를 다졌다. 톰 홀랜드·에마 라두카누 등 영국의 유명 인사들이 그의 열혈 팬이다.
▶이 배경엔 축구 실력과 더불어 뛰어난 영어 구사 능력이 있다. 사실상 독일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손흥민은 영어도 독일어 발음이 섞인 것처럼 말한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기에 팀 안팎에서 쉽게 어울리고 동화될 수 있었다. 그렇게 ‘원팀’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면 득점왕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다는 사람이 많다. 이미 외국어는 ‘도구’가 아니라 ‘필수’라고 하지만 이제 점점 더 그런 시대로 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