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시중은행에서 고객 돈 수억원을 빼돌린 전산부 직원이 적발됐다. 은행의 이자 계산 프로그램을 몰래 고쳐, 예금주들에게 지급하는 이자 중 원 단위 이하는 자기 개인 계좌로 이체되도록 조작했다. 고객이 푼돈까지 신경 쓰지는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티끌 모아 태산’ 범죄를 설계한 것이다. 완전 범죄가 될 수도 있었지만 원 단위까지 들여다본 꼼꼼한 고객의 항의로 덜미가 잡혔다.
▶중국의 횡령 범죄는 스케일부터 광대하다. 중국은행의 지점장 쉬차오판은 부하 직원 둘까지 끌어들여 10년에 걸쳐 미국과 홍콩으로 5700억원 넘는 돈을 빼돌렸다. 유령 기업에 대출해주는 식이었다.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아내와 이혼한 뒤 미국인과 거짓 결혼식을 올려 미국 영주권까지 취득해뒀다. 2001년 횡령 사실이 들통나자 미국으로 달아났다가 2년 만에 체포됐고 복역 중에 2018년 중국으로 송환됐다. 범죄 영화를 보는 듯했다.
▶2014년 개봉된 일본 영화 ‘종이달’은 유부녀 은행원이 연하남과 사랑에 빠져 은행 돈에 손댄 횡령 사건을 다뤘다. 처음엔 고객 돈 1만엔을 슬쩍했다 들키지 않자 점점 액수를 키워 연하 애인에게 집을 얻어주고 차까지 사줬다.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 돈의 유혹에 빠져드는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0년 전 삼성전자 재무팀의 30대 엘리트 사원이 회삿돈 165억원을 횡령해 도박으로 탕진했다가 쇠고랑을 찼다. 법정에서 ‘충동 조절 장애’라며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은행 본점에서 40대 은행원이 2012년부터 600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긴급 체포됐다. 신용이 생명인 은행에서 어떻게 무려 10년 동안이나 발각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부 통제 시스템이 무너진 셈이다. 정상 유통되는 돈을 훼손된 지폐로 둔갑시켜 13억원 넘는 돈을 캐리어에 챙겨 담아 달아나다 잡힌 은행원도 있었다. 4년여 동안 국내 은행에서 발생한 금융 사고가 182건, 1600억원이 넘는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겨 놓은 격이다.
▶횡령 범죄자들은 빼돌린 돈을 주식·선물 투자 등으로 굴린 뒤 다시 메워 넣을 요량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도 사치, 도박 등에 빠지면 자제력을 잃고 판단력이 마비된다. 작년 한 해 동안 벌어진 횡령 사건만 5만386건, 금액으로는 6조8000억원에 이른다. 기업, 관공서, 금융기관 가릴 것 없이 하루 138건꼴로 횡령이 벌어진 셈이다. 빼돌린 돈으로 투자에 성공한 뒤 공금을 메워 넣으면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런 ‘완전 범죄자’들은 그 몇 배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