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로 경기력을 키우는 도핑(doping)은 남아프리카 카피르족이 사냥 전 원기를 북돋으려 마시던 음료인 ‘도프(dop)’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미국에서 마약을 뜻하는 속어인 ‘도프(dope)’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이 있다. 과학기술 발달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도핑은 1960년 로마 올림픽 사이클 경기 도중 덴마크 선수가 암페타민 과다 복용으로 급사하면서 인식이 달라졌다. 1968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 올림픽부터 도핑 검사가 시작됐다.
▶2014년 12월 독일 방송이 “러시아 올림픽 팀의 99%가 금지약물을 복용하며, 국가가 나서서 소변 샘플을 조작한다”고 폭로했다. 2년 뒤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 핵심 관계자 2명이 모스크바에서 돌연사했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도핑의 역사’를 집필 중이었다. 신변 위협을 느낀 또 다른 RUSADA 핵심 관계자가 미국으로 망명해 러시아의 도핑 실태를 폭로했다.
▶이 폭로를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2011~2015년 동·하계 종목을 막론하고 자국 선수 1000여 명에게 약물을 먹였다. 러시아는 올림픽 도핑 역대 최다 적발국(47명)이지만 실제는 훨씬 많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개최국이었던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때는 정보기관 요원들이 RUSADA에 잠입해 소변 샘플 바꿔치기로 도핑을 감추려 했다. 러시아는 총 메달 33개(금 13개)로 종합 1위를 했지만, 이후 메달 11개가 박탈됐고 2018 평창 올림픽부턴 선수들이 개인 자격으로만 참가 가능하다.
▶예테리 투트베리제 러시아 여자 피겨스케이팅 대표팀 코치는 소치부터 평창, 베이징까지 10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연속해서 배출하고 있다. ‘예테리의 소녀들’은 성인 남자 선수들도 버거워하는 4회전 점프를 10대 초반부터 뛴다. 이 코치가 체중 관리를 위해 물도 많이 못 먹게 하고, 2차 성징을 늦추려 폐경 유도제(루프론)를 먹이고, 각종 약물 투여를 강요한다는 사실을 3년 전 13세 러시아 선수가 폭로했는데 배신자로 찍혀 국적을 우크라이나로 바꿔야 했다. 베이징 올림픽을 집어삼킨 발리예바 사태는 예견된 일이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국제 대회 성적은 내리막을 걸어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선 11위(금3)까지 떨어졌다가 푸틴 재집권 이후 반등했다. 푸틴에겐 올림픽 금메달도 ‘강한 러시아’에 필수 요소다. 페어 플레이와 선수의 건강엔 아무 관심도 없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켜 힘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것과 올림픽 도핑 스캔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우연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