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한결같이 핸드백을 들고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 지나가면 향수 냄새가 났다.’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 장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그려진 1970년대 초 아프간 수도 카불 풍경이다. 지금도 인터넷엔 당시 얼굴 가득 미소 띤 카불 여성들 사진이 돌아다닌다. 툭하면 폭탄 테러가 터지고, 여자들은 눈까지 망사로 가린 부르카 차림으로 살아가는 나라에 이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일러스트=김도원

▶아프가니스탄은 실크로드 무역을 중개하며 번영했던 동서 교역로이자 중앙아시아 정치의 중심지였다. 아프간인들은 용맹한 전사의 피를 가진 민족이기도 하다. 티무르의 후예 바부르는 카불을 근거지 삼아 인도를 공략해 무굴제국을 세웠다. 세계 최강 영국과 세 번 싸워 모두 물리쳤다. 1979년 이 나라를 침공한 소련도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의 저항에 굴복해 10년 만에 물러났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간에 진주해 탈레반을 축출했던 미국이 이 나라를 떠난다. 전쟁에 졌다기보다는 아프간 정부의 부패에 넌더리를 냈다고 한다. 미국이 지난 20년간 아프간에 쏟아부은 돈이 2조4000억달러(약 2758조원)다. 그중엔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70~80%를 차지하는 이 나라 농토를 밀 농장으로 바꾸기 위해 농민들에게 지급한 보조금 등 국가 재건 비용 1300억달러도 있다. 모두가 헛수고가 됐다.

▶아프간은 정부 회의장에서 폭탄이 터지는 나라다. 테러 희생자 사망 신고를 하는 데도 뇌물을 써야 할 만큼 온 나라가 썩었다. 관리 상당수는 탈레반 반군과도 연결돼 있다. 연간 40억달러에 이르는 마약 판매 수익이 탈레반 수중에 들어가 미군을 죽이는 무기 구매 자금으로 쓰인다. “왜 이런 나라에 돈을 쓰느냐”며 미국 내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 대통령은 여론을 이길 수 없다.

▶미군이 아프간을 떠난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야반도주’ 같다고 했다. 실제 그랬다. 밤에 돌연 사라졌고, 수많은 장비는 방치했다. 제일 먼저 도둑들이 낌새를 채고 텅 빈 기지에 몰려가 물건을 약탈했다. 아프간 정부는 까맣게 몰랐다. 그다음은 예정된 절차로 가고 있다. 탈레반이 카불 남쪽 150㎞까지 진격했다. 미국은 그동안 협력한 현지인 수천 명을 자국으로 도피시키기로 했다. 1975년 베트남 사이공 탈출극의 재연이다. 부패한 정부, 희망도 의지도 없는 국민, 스스로 돕지 않는 나라는 누구도 지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