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주한독일대사관이 주최한 '독일 통일의 날' 행사에 참석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연설하고 있다. /김보경 기자

지난 25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연설을 들으면서 여러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한 독일 대사관이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을 기념하며 주최한 ‘독일 통일의 날’ 행사 자리였다. 공관 대사 등 재한 해외 인사들과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 초청받은 정 장관은 불쑥 “대사님들, 12·3 계엄으로 놀라셨죠?”라는 인사를 건넸다. 정 장관은 이 말에 자막까지 준비했다.

정 장관은 “독일 통일 정책의 일관성이 부럽다”고 하면서 “한국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이후 시작된 교류와 협력이 보수 정권들에 의해 파괴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고, 박근혜 정부에서 개성공단이 폐쇄됐으며, 윤석열 정부에서 화해와 협력의 기초가 파괴됐다”고 했다. 정 장관은 금강산 관광 중단의 원인이 우리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 총격에 숨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때문이라는 것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을 ‘가장 적대적인 두 국가’라며 한국을 핵 공격 대상으로 못 박은 것도 말하지 않았다.

정 장관은 “독일은 통일부가 없어 통일을 했고 한국은 통일부가 있어 아직 통일을 못한 것 같다”고도 했다. 이 ‘셀프 디스’성 발언은 아마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내 인사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분단 국가의 통일부 수장이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데 누가 웃을 수 있겠는가. 정 장관은 앞서 지난 7월 인사청문회 때는 “통일부 명칭을 ‘한반도부’로 바꾸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 장관은 또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남북 관계의 현실과 미래를 꿰뚫은 명언”이라며 원효대사의 불일불이(不一不二) 사상을 언급했는데, 이는 “정부는 두 국가를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실의 발언과 차이가 있다.

정 장관 연설이 끝난 뒤 만난 한 인사는 “정말 낯 뜨겁다”고 했다. 각국 외교관들이 모인 통합의 자리에서 우리 정부 장관이 국내 정치에 매몰돼 분열의 언어를 난사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정 장관은 보수 정부 공격하느라 현재 한반도의 엄중한 안보 현실은 한마디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장관에 앞서 연설한 게오르크 빌프리드 슈미트 주한 독일대사가 “북한 군인들이 유럽(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싸우고 있다”며 북·러의 군사 밀착을 우려했다.

정 장관은 독일·벨기에 방문을 위해 28일 출국했다. 현지에서 열리는 통일의 날 기념행사와 ‘국제한반도포럼(GKF)’ 독일 세미나에 참석하고 정부·의회 인사들을 만난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독일 대사관 행사 때와 같은 연설을 할까 걱정된다.

지난 25일 '독일 통일의 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영어로 "독일은 통일부가 없어 통일을 하고, 한국은 통일부가 있어 아직 통일을 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한 발언이 자막으로 띄워진 화면을 청중이 지켜보고 있다. /김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