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규모의 원자력발전소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피점령 지역에서 대대적 반격을 벌이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군이 점령한 이곳에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누출 사고 이후 최악의 핵 재앙이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일고 있다. 최근 자포리자를 겨냥한 공격이 잇따른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서로를 공격의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상주 인력을 파견했다.

문제는 원전에 최악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언론 통제 때문이다. 집권 후 정권에 비판적인 매체와 언론인을 탄압해온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언론 통제에 더 고삐를 죄고 있다. 푸틴은 지난 3월 이른바 허위 사실 유포 금지법을 시행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보도 내용과 관련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러시아 정부가 허위라고 간주하면 보도 담당자 등에게 최대 징역 15년까지 선고하도록 했다. 앞서 푸틴 정권은 2017년 자국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해외 언론사들의 취재를 통제하는 법안도 도입했다. 자신의 철권 통치를 비판하는 서방 언론들을 겨냥한 것이다.

억압적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해외 언론이 잇따르고 있다. 푸틴 정권의 행태는 지난달 세상을 떠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과 확연히 대비된다. 우크라이나 지역 체르노빌은 1986년 방사능 누출 사고 당시 소련에 속해 있었고, 당시 소련 최고 통치자인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2년차에 접어든 고르바초프였다. 사고 직후 소련 정부는 대내외에 오염 정도와 누출 지역을 축소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의 참상과 심각성이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속속 밝혀졌다.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그래도 사실을 알리는 비판 보도가 나올 수 있었던 건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에 따라 언론과 출판 검열이 완화됐고, 체제 비판이 허용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소련은 붕괴됐지만, 고르바초프 집권 때의 개혁·개방 분위기를 타고 러시아에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언론 매체들이 생겨나면서 민주주의 정착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그러나 푸틴의 철권 통치 이후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만약 지금 러시아가 장악한 자포리자 원전에서 방사능이 누출된다면 어떻게 될까.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이 현장을 방문하는 등 국제사회가 관여하고 있지만, 통제권이 러시아에 있는 한 원전을 둘러싼 진실 공개 역시 그들 손에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엔 방사능이 누출됐음에도 진실이 은폐될 수 있다. 팀 데이비 BBC 사장은 지난 3월 러시아에서 보도 중단 결정을 내리며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진실의 희생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