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새누리당 소속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영장 없는 통신 감청 등 국가정보원의 정보 수집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했다.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47년 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맞섰다. 민주당 주도로 192시간 26분 동안 지속된 이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에는 강기정·유승희·진선미 등 야당 국회의원 38명이 참여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현판식 열고 공식 출범. 2021년 1월2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에 열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현판식에서 윤호중 국회 법사위원장(왼쪽 두 번째부터),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 추미애 법무부 장관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1.1.21 /연합뉴스

지금도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필리버스터에선 주옥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국민을 추적하면 안 된다”고 했고, 정청래 의원은 헌법 조문을 읊으며 “북한이 미사일을 쐈는데 왜 국민의 휴대폰을 뒤지려 하느냐”고 했다. 조부의 이름에 누가 될까 언급을 꺼리던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의원은 “우리 할아버지가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라며 12시간 31분짜리 신기록을 세웠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 후보는 열성 지지자 대열에 있었다. 문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눈물로 마친 필리버스터 감동!!”이라며 의원들을 향해 실시간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띄웠다. 당시 초선인 은수미 성남시장의 눈물이 야권에서 화제가 된 가운데, 이 후보는 미래의 후임자에게 “쓰러지시는 줄 알았다”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 말살 악법을 꼭 막아 달라”고 했다. 연설에 감읍한 조국 전 법무장관은 “심지가 굵고 강단이 있다”며 은 시장을 ‘강철 나비’라 불렀다.

그해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1당이 됐고, 이듬해에는 정권까지 잡았다. 그렇다면 테러방지법은 ‘3기 민주 정부’와 ‘180석 여당’에 의해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그대로 살아남아 지지자들에게 “이러려고 촛불 들었냐”는 원성을 들었다. 재작년 9월에는 민주당 이병훈 의원이 ‘K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이들을 처벌하겠다는 취지로 개정안을 냈다가 참여연대에 “개정 대상이 아니라 폐지 대상”이라는 면박을 받았다.

‘촛불’로 세워졌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야당 국회의원, 언론인과 그 가족을 상대로 무분별한 통신 자료 조회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기관이 권한을 남용해 시민들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뒤진다는 점에서 5년 전 논란과 그 본질은 같다. 그런데 “평범한 삶을 사는 나와 이웃의 스마트폰이 뒤짐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냐”(배재정 전 의원)고 외치던 여당 의원들은 지금 묵언 수행 중이다. 세밑 열린 법사위에서는 이들이 김진욱 공수처장의 변호인을 자처하는 모습까지 연출됐다.

이번 정부 들어 반복된 ‘선택적 침묵’은 그대로였다. 청와대는 “공수처는 독립 기관인데 관련 언급이 부적절하다”고 했고, 이재명 후보는 “통신 자료는 수사에 중요한 자료”라며 “사찰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강철 나비’는? 역시 아무런 말이 없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