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18일, 각기 다른 운동장을 달리던 고등학생 세 명이 사망했다. 체력장 시험을 치르다 일어난 일이었다. 이른바 ‘학력고사 세대’는 대입을 위해 좋은 체력 점수가 필요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가 전국을 휩쓸던 시기였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체력을 다질 시간을 학교가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많은 학생이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시험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죽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참극은 1994년 수학능력시험이 자리를 잡으며 사라졌다.

‘나 때는’ 없었던 ‘킬러 문항’이라는 말을 들으며 생각난 건, 운동장을 달리다 숨이 끊어진 학생들이었다. 심화 문항도 응용 문항도 아니고 ‘킬러 문항’이라니 얼마나 어렵기에 그런 단어를 쓰는 걸까.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나라에서 너무 얄궂은 작명 아닐까. 저 문제를 풀지 못해 진짜로 죽는 학생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왜 이런 말을 처음 들어봤을까. 입시 문제란, ‘나의 일’일 때와 ‘내 자식의 일’일 때 말고는 모두의 관심 밖에 있는 것 아닐까.

교육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교육은 입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입시의 공정함이란 자주 입시의 유불리로 치환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새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계의 입씨름으로 좁아져 버린 ‘교육 개혁’ 문제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답답하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학생을 위해서’라는 명분이지만, 그 대리전에서 실제로 트랙을 달리는 학생들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해결책이 없으리라는 뿌리 깊은 불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섣부른 비관은 금물이다. 각계의 공론을 모으고 더 많은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찾는 과정만큼은 ‘아름다운’ 명답이 될 수도 있다. 수능 150여 일을 앞둔 지금 시간이 많지 않다. 만약 ‘킬러 문항’이라는 레토릭에 매몰되어 또다시 지난 30년간 반복된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금의 수능 또한 ‘사람을 죽이는’ 비합리적 제도로 후대가 기록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