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박상훈

서울 강남역 인근 어느 미용 의원. 오전 10시가 되자 대기실이 서서히 붐비기 시작한다. 피부 레이저 시술과 보톡스 주사를 받으려는 환자들이다. 진료실 안에는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가 앉아 있다. 의대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따자마자 이곳에 뛰어든 신참 의사들이다. 그들은 대학 병원 병동을 돌며 환자를 진료하거나, 응급실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의사로서 수술복을 입고 수술에 참여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레이저 장비를 다루고, 보톡스나 필러 주사를 사람 몸에 꽂으며 하루 수십 명의 ‘환자 고객’을 만난다.

미용 의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의사 프로필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많다. XX과학고 졸업, 카이스트 XX학부 졸업, XX의전원 졸업. 그다음에 대학 병원 근무 경력은 없다. 의사 면허 손에 쥐자마자 미용 의료 시장에 나온 것이다. 전국 미용 의료에 이런 경력의 의사가 수두룩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미용 의료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의과대학별로 졸업생의 5~10%가 인턴·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미용 의료에 곧장 뛰어드는 것으로 추산된다.

선진국에서는 미용 의료든 필수 의료든 이렇게 의사 면허를 취득하자마자 아무 임상 경험 없이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정 기간의 임상 연수 또는 수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환자를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진료 술기를 배우고 응급 상황 대응 능력을 익힌 뒤에야 독립적으로 환자 진료가 가능하다.

일본은 임상연수제(臨床研修制)를 시행하고 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전문과에 들어가거나 개업 등으로 환자 진료를 하지 못하고, 2년 동안 의무적으로 임상 연수를 받아야만 한다. 이 기간에 내과, 외과, 응급의학, 소아과, 산부인과, 정신과 등 여러 과를 순환하며 근무한다. 병력 청취와 신체 진찰, 응급 환자 대응, 기본 시술 등 의사로서 갖춰야 할 진료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간단하다. 환자를 보호하고 의사의 기본적인 진료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미국 역시 비슷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바로 환자를 독립적으로 진료할 수는 없다. 최소 1년 이상의 레지던트 수련을 거쳐야 주(州)정부로부터 정식 진료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다. 수련 기간 진료는 항상 상급 의사의 감독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의사 면허 취득 직후 곧바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사실상 유일하지 싶다.

빅5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에서 필수의료로 전문의를 딴 의사들까지 서울 청담동과 목동 번화가 피부 미용 의원 개업에 몰리고 있다. 사진은 코엑스에서 열린 ‘한의학 및 통합의약 국제산업박람회’ 더원메디칼 부스에서 색소지우개 토닝레이저 제품을 시연하는 모습. /뉴스1

우리나라는 임상 경험이 없는 ‘초짜 의사’들이 의사 면허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대거 미용의료 시장으로 유입된다. 미용의료 시술 의사 독점이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한국에서는 보톡스, 필러, 레이저 시술 등 미용의료 행위를 의사만 할 수 있다. 간호사나 다른 의료 인력은 할 수 없기에 미용 의료는 의사 중심으로 진입 장벽을 세운 고수익 영역으로 구축됐다.

일본에서는 피부 레이저 시술을 의사가 직접 하기도 하지만, 의사의 지시와 감독 아래에서 간호사가 레이저 시술을 시행할 수 있다. 의사는 진단과 시술 계획을 세우고 간호사가 실제 장비를 다루는 팀 진료도 이뤄진다. 미국에서는 이보다 더 다양한 의료 인력이 미용 의료에 참여한다. 임상 간호사, 의사 보조 간호사(PA), 레이저 테라피스트 등이 레이저 시술을 할 수 있다. 일부 주에서는 보톡스 시술도 임상 간호사가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전국의 수재가 죄다 의대로 가고, 이들의 상당수가 의사 면허 따자마자 임상 연수도 없이 바로 의사 독점 미용 시장으로 가서 돈을 벌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의사과학자로 키워도 좋을 인재들이 제도의 미비와 미용 시장의 독점으로 미용 의료로 빠지고 있다며 혀를 찬다.

현재 한국 의료가 직면한 최대 문제는 필수의료와 중증의료에 몸담는 의사가 태부족이라는 점이다. 응급실을 지키는 의사, 야간 응급 수술하는 외과의, 고위험 분만을 다루는 산부인과 의사 등이 없어서 병원마다 난리다. 응급실 뺑뺑이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 조마조마하단다.

이제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우선 필수의료와 중증의료 의료진에 대한 보상을 강화해야 한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외상센터, 분만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간호사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참 의사 임상 연수 의무화도 도입할 때다. 의사 면허 취득 후 내과, 외과, 응급의학과 등의 수련을 통해 진료 능력을 키우고, 응급 대응 능력을 갖춘 의사를 양성해야 한다. 그게 환자를 보호하고 의료의 전문성을 키우는 길이다. 임상 연수를 하다 보면,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 종사에 보람을 느끼고, 그 분야에 나설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미용의료 시술 자격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의료기관에 소속돼 의사의 지도를 받는 간호사는 출력 에너지가 높지 않은 레이저 시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의료 안전을 확보하는 범위 내에서 미용 의사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못 할 게 무엇인가.

의사 면허는 의료의 출발점이지 완성된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환자를 제대로 진료하는 의사가 되려면 다양한 임상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 여러 나라가 공통적으로 의사 면허 있다고 바로 환자 진료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젊은 미용 의사 개인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그들을 그 자리로 이끈 것은 한국 의사 양성 시스템의 후진적인 구조다. 필수 의료에는 의사가 부족하고, 미용 의료엔 의사가 북적대는 현실. 이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는 한 한국 의료에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