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지역 차별이라는 아픈 기억을 대대로 공유하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나는 당연한 듯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하지만 이후 여러 경험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지금은 민주당과 그에 동조하는 시민 단체만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호남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파의 불모지인 호남에서 힘들게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들을 만나고 있다. 그중 큰 울림을 준 J라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J는 한때 강성 좌파 단체인 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에서 활동했다. 대진연은 친북 성향 학생운동 단체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후신으로 ‘김정은 연구 모임’을 만들어 김정은을 찬양하고, 반미 시위를 주도하며 주한미국대사관저와 용산 미군 기지에 난입하고, ‘태영호 체포 결사대’를 만들어 협박하고, 나경원 의원실을 기습 점거하는 등 과격한 활동으로 유명해진 단체다. J에게 물었다.
나: J야. 넌 어떻게 그 단체에 들어가게 됐어?
J: 어렸을 때부터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부자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있는 국힘(당시 한나라당)에는 마음이 잘 안 가더라고요. 거기다 밥상머리에선 맨날 이명박과 박근혜 욕을 들었고,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정치 진영을 선과 악으로 나눠 보는 세계관이 형성된 것 같아요. 형도 광주 분위기 아시잖아요(웃음). 대진연은 저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에게 접근했어요. 친해진 뒤에는 5·18 폭력 진압 영상과 세월호 관련 영상을 보여주며 분노를 심어주죠. 그리고 ‘사람이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데 함께하자’며 행동하게 만들어요.
나: 아무리 그래도 대진연과 지금 너의 활동 방향은 너무 먼 거리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탈출하게 된 거야?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J: 맥도널드에서 알바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 헐, 맥도널드? 아니 대진연식 세계관에서 맥도널드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이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부르주아의 상징 아니야?
J: 하하, 돈이 궁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햄버거로 끼니도 해결할 수 있었고요. 근데 막상 일해보니 휴식 시간, 주휴 수당, 추가 근무 수당 칼같이 챙겨주고, 근무 스케줄도 근로자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서 짜주는 거예요. 오히려 근로자들을 존중해주고 시스템도 민주적이더라고요. 직원을 기계 부품처럼 소모하고 착취한 뒤 버리긴커녕 ‘이 소중한 직원을 잘 교육해서 우리 회사를 책임질 인재(staff)로 성장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였어요. 기업을 다시 보게 된 거죠. 대진연 동지들보다 맥도널드 직원들이 더욱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어요. 어느 순간 대진연을 비롯한 주사파 운동권들이 기업에서 일도 제대로 안 해봤으면서 노동 어젠다를 떠드는 게 한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일자리가 많지 않은 지방 청년의 삶을 대진연에서 활동했을 때보다 잘 알게 됐죠. 그런 상태에서 입시 비리로 딸을 의대 보낸 조국을 대진연 사람들이 옹호하는 걸 보니 분노할 수밖에요. 이미 기득권이 된 운동권을 우리가 왜 편들어 줘야 하나요? 게다가 김정은은 정권을 지키려 북한 주민을 탄압하고 있잖아요. 이런 김정은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대진연에서 분명히 보았고 이들과 연관된 인사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일하는 걸 보니 나라가 위험해 보이더라고요.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대한 위협이잖아요.
나는 J의 이야기를 듣고 우파에서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인 기업활동이 오히려 ‘사람이 사람다운 사회’를 더 잘 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인 아픔을 겪어 생긴 선악의 세계관이 대대로 공유되어서일까? 대진연을 비롯한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 단체에는 호남 출신 청년이 많고 리더 그룹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고 한다. 내 고등학교 동창이 서울 명문대 좌파 단체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말하길 “광주 출신은 혁명의 피가 흐른다”며 우대해줬다고 했다. ‘웃픈’ 현실이다. 한 정당만 줄기차게 추종했지만 광역시급 대도시에 복합 쇼핑몰과 5성급 호텔이 하나도 없어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광주를 떠나가고, 시민들이 원정 쇼핑을 가는 현실은 여전하다.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부르짖은 5·18의 고장 호남이 끔찍한 인권 탄압을 저지르는 김정은 정권을 옹호하는 세력에 지지를 보내는 현실은 또 어떤가.
이런 현실을 바꿔보고 싶다. 긴 시간 동안 다져진 강고한 현실의 벽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는 글을 쓰고 싶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닌 그 자체로 모두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또 자유 시장 경제가 왜 필요한지 말씀드리고 싶다. 특히 내 고향 호남에 계신 분들께서 꼭 봐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