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방 해변을 찾았다. 대관령 너머 영동 지방의 남쪽 끝이다. 국도 7호선을 타고 한 모퉁이만 더 돌면 경상북도다. ‘끝’이란 말 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허허로움이 숨어 있다. 마치 한 장 남은 달력의 12월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답사 도반 T와 함께 강원도 삼척의 호젓한 겨울 바다를 찾았다. BTS 팬클럽 ‘아미(ARMY)’들의 새로운 성지로 뜨고 있는 곳이라고 ‘영동의 은자’인 글동무 D가 설명을 보탠다. 세계적인 가수 방탄소년단(BTS)의 최신 인기곡 ‘버터’의 앨범 재킷 사진의 배경 바다인 까닭이다. 이른바 ‘방탄 투어’ 코스 가운데 가장 최근에 등장한 명소다. 2021년 팬클럽에 의해 공식 성지로 등록되었다.
이 해변에는 팬클럽 아미가 아니라 본래 아미(army·육군)가 반 백년 동안 지켜 온 ‘국방의 성지’도 있다. 바다로 돌출된 작은 반도 덕봉산은 3면을 살피기에 더없이 좋았다.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하지만 올봄 4월 1일에 경계용 철조망이 53년 만에 철거되면서 백사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인 바위 해안의 절경이 주민과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옛 초소 건물과 무인용 감시 카메라가 사방으로 돌아가는 소리는 아직도 ‘냉전’이 현재진행형임을 알려준다. ‘당신의 아들딸들이 조국을 지키는 현장’이라는 경고문은 민(民)과 군(軍)이 둘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안내문으로 문투가 바뀌었다. 이제 안보와 관광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겸한 것이다.
꼭대기 회선대(會仙臺)는 전망이 그림 같은 곳인지라 가끔 선녀들이 내려와서 놀았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아미 회원으로 가입하겠다며 무리지어 내려와 백사장의 BTS 포토존까지 달려와서 셀카를 찍고는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회선대로 향하는 나무 덱 길은 ‘선녀의 계단’이라고 하면 더 좋았을 덴데 ‘천국의 계단’이란 다소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터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의 성지였다. 냇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인지라 땅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동네의 화평과 후손들의 안녕을 위해 향나무를 펄에 묻는 매향(埋香) 의식을 치렀다. 또 가뭄 때는 기우제를 올렸다. 모래 바닥을 뒤집어 놓을 만큼 큰 태풍이 지나간 뒤 그때 묻어놓은 값비싼 침향(沈香)이라도 발견한다면 정말 재신(財神)이 강림한 날이 될 것이다. 향나무뿐만 아니라 대나무도 남달랐다. 과거 시험장에서 사용할 화살을 만든 결과 무난하게 무과(武科)에 합격했다는 조선 중기 홍견(洪堅)의 신분 상승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향리의 자랑거리다.
덕봉산(德峰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덕산도(德山島)라고 표기했다. 조선시대만 해도 육지와 확연히 나눠진 섬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안에서 가까운 탓에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육지와 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쌓이면서 서로 연결되었다. 지금도 마읍천(麻邑川)이란 만만찮은 넓이를 가진 냇물이 이 지점에서 바닷물과 합류하고 있다. 오랜 세월 장마 때마다 범람한 강물이 싣고 온 진흙과 자갈이 섬의 육지화를 가속시켰을 것이다. 진입로에 설치한 운치 있는 외나무다리 아래로 힘차게 흐르는 냇물은 여기가 덕봉산이 아니라 덕산도였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서해안처럼 조수 간만 차이가 심하다면 밀물 때는 외나무다리 덕분에 바닷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제 12월의 끝이지만 다시 새로운 1월이 시작될 터이다. 맹방이 해안선길 따라 아랫녘으로 내려가는 사람에겐 강원도의 끝이겠지만 위쪽으로 올라오는 이에겐 강원도의 시작점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