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꿈은 내 힘으로 컴퓨터를 사는 거였다.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왜 컴퓨터가 필요한지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컴퓨터로 공부도 하고 숙제도 하고 정보도 얻을 수 있고.” 부모님은 잘 믿지 않았다. 나였어도 안 믿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컴퓨터가 뭔지 잘 몰랐으니까. 가정용 컴퓨터가 막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수업이 끝나면 컴퓨터가 있는 친구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눈을 반짝이며 그 친구가 컴퓨터를 다루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
XT가 AT가 되고, 286이 586으로 발전하는 동안,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컴퓨터를 제대로 접하게 되었다. 내 컴퓨터는 아니고 기숙사 룸메이트의 컴퓨터였다. 그 친구를 통해 ‘디아블로2’를 알게 되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하나의 게임에 접속해서 함께 대화하고 모험을 한다는 것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낮에는 대학생, 밤에는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가며 게임 속의 삶을 마음껏 즐겼다.
어느 날 오후 수업이 취소되었고, 나는 쾌재를 부르며 게임에 접속했다. 신나게 던전을 탐험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동안 모은 아이템을 던전 속에 떨어뜨리고 알몸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허무했다. 누군가 내 아이템을 훔쳐갈 것이라는 생각에 채팅창에 울음 표시를 연타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지나가던 아마존 전사가 무슨 일이냐 물었고, 나는 짧은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아마존은 갑자기 자신이 장착한 모든 아이템을 벗어던지더니, 나처럼 알몸으로 던전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내 아이템을 모두 풀장착한 상태로 등장했다. ‘아, 이 녀석이 내 아이템을 훔쳐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채팅창에 분노를 표출하려는 순간, 아마존이 아이템을 훌훌 벗어던지며 쿨하게 말했다. “이건 너의 것이야.”
그 친구의 아이디는 TOM SAM이었다. 미국에 사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떤 상처로 인해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매일 밤 디아블로2를 하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하지만 늘 우울한 생각이 밀려들어서, 이대로 계속 살아가도 좋을지 자신이 없다고 했다. 바다 건너 사는 미국 청소년에게 가난한 한국 대학생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매일 게임을 같이 할 테니 슬퍼하지 마.” 그렇게 우리는 매일 디아블로2의 세상에서 만났다. 문제는 그 친구의 밤이 나의 낮이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한 학기를 휴학했다. 철없는 짓이었지만, 그때는 간절했다. 톰은 내 최고의 친구였다. 그저 게임에서 스쳐 지나가는 존재 중 하나였을 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아이템을 되찾아준, 내 히어로 톰이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날이 많아지면서, 어딘가를 모험하기보다 한자리에 머물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많아졌다. 톰은 가족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아버지는 날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관심이 없고, 형은 집에 안 들어온 지 오래고….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고 나면 톰은 꼭 말했다. “너랑 대화를 나누니까 기분이 좀 풀려. 고마워.”
톰이 어느 날 말했다. “아버지가 디아블로2를 시작했어.” “오, 아버지도 게임을 좋아하셔?” “아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그럼 왜?” “…아마도 …나랑 친해지고 싶었나봐.” “한동안 조용하던 톰이 불쑥 말했다. “온라인 게임에 관한 직업을 갖고 싶어. 나처럼 뭔가 힘들어서 집 밖을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게임 속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참 좋은 꿈이네. 그럼 뭐부터 시작을 하면 되지?” “일단, 학교를 나가야지.”
그날 이후 톰의 접속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 날부터 게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다시 복학을 했고, 아주 오랫동안 톰을 잊고 지냈다.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게임을 끊게 되었다. 톰은 정말로 학교에 나갔을까. 톰과 아버지는 게임 속에서 서로에게 속마음을 고백했을까. 톰은 원하던 대로 게임 속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며 또 다른 톰에게 행복을 주고 있을까? 얼마 전 메타버스에 대한 뉴스를 읽으며, 아주 오랜만에 톰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