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계신 삼촌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버지의 날을 축하해! 새로운 일상에는 잘 적응하고 있니?” 메시지를 받은 시점은 6월 중순, 딸이 태어난 지 겨우 두 달째라 적응은커녕 잠이나 잘 수 있길 바랐던 때였다. 나는 삼촌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밤이 가장 짧다는 하지를 지나 여름이 성큼 오고 있었고, 여름 안에는 답을 찾아야 했다.

밀레니얼 톡 삽입 일러스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상에서 시도한 건 두 가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 그 시간이 부족하면 출근할 때 일부러 더 걸어서라도 시간을 확보할 것. 출근 시간을 두세 시간 앞당겼고, 몸을 더 움직이는 방향으로 출근 방법도 바꿨다.

그전에는 걸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역삼역 3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10보만 걸으면 회사 건물 로비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점심 전후로 늦게 출근해 늦게 퇴근했고 그마저도 택시로 귀가하기 일쑤였다. 서서히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없는 건 나의 시간이 아니라 여유와 의지였다.

생각할 시간을 얻으려면 몸이 움직이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요즘은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지 않는 한, 집에서 왕십리역까지 자전거로 이동하고 선릉역에서 내린 다음 한 정거장 거리는 그냥 걷는다. 선릉에서 역삼까지 지하철로는 2분, 테헤란로를 따라 걸으면 20분 걸린다. 누군가에게는 바쁜 출근길에 걷는 행위가 사치일 수 있겠지만, 내겐 하루의 숨을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완만한 오르막을 걷는 동안 특별히 뭔가를 하는 건 아니다. 직장인 무리를 따라 걸으며 라디오나 음악을 듣고 가끔은 고층빌딩 앞 화단이나 조형물을 분주히 청소하는 관리인을 관찰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풀리지 않는 글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사는 데 아무 짝에 쓸모없지만 아무 거나 먹긴 싫은 점심 메뉴까지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회사에 도착해있다.

하루에 3만보씩 걷기로 유명한 배우 하정우는 ‘걷는 사람, 하정우’를 통해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생애 마지막 4박 6일이 주어진다면, 몸을 움직여 계속 걷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걷기 예찬론자이다. 오늘날의 디즈니 왕국을 만든 경영인 로버트 아이거는 매일 새벽 4시 15분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는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서 “하루 과업을 수행하기 전에 사색하고 독서하고 운동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전화 통화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새벽 시간이 없다면 나의 생산성과 창의성도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라고 썼다.

새벽 4시 15분에 일어나거나 하루에 3만보씩 걸을 자신은 없지만, 당분간은 꾸준히 걷고자 한다. 여름이 한창일 때 20분을 걸으면 땀도 제법 난다. 그래서 땀 흘릴 각오로 걷는다. ‘각오’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겪을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 도리를 깨쳐 앎을 뜻한다.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 그날 기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직하게 두 다리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걷기를 통해 배운 가장 큰 교훈이자 매일 되새기는 각오다. 일상의 대부분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지루하다. 하지만 그 쳇바퀴를 스스로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아이는 한창 뒤집기를 연습 중이다. 아내는 입추가 지나면서 집 근처 하천을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 세 식구가 온전히 자신만의 보폭으로 함께 걸을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