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도 계절마다 누리는 즐거움이 달랐다. 여름에만 향유할 수 있는 최고 호사는 ‘청개화성(聽開花聲)’이었다. 해 뜰 무렵 배를 타고 연 밭으로 가서 연꽃 피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이른 아침 연지(蓮池)에 작은 배를 띄우고 연 줄기와 잎줄기 사이를 조심스럽게 다니면서 꽃잎이 열리는 순간 포착과 함께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가만히 음미했다. 배를 띄울 수 없는 경우에는 연 방죽에 돋은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을 털고 지나가면서도 귀를 쫑긋 세운 채 물가에서 그 소리를 듣고자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하지만 서거정(1420~1488)은 달랐다. 연꽃이 벌어지며 내는 소리가 아니라 연잎 잔에 빗물처럼 가득 부어놓은 파랗게 비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며 “캬아!” 하고 자기 목 안에서 나오는 감탄사를 더 즐겼다. 차를 좋아하는 이들은 저녁 무렵 꽃잎이 닫히기 전에 성근 삼베 주머니에 싼 녹차를 꽃술에 던져 넣고는 재빠르게 꽃잎을 비단 실로 봉했다. 시간이 흐른 뒤 찻잎에 한껏 스며든 연꽃 향기를 차향과 더불어 마셨다.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하나같이 연지 근처에서 만끽하는 그들 나름의 피서법인 셈이다.

어쨌거나 연꽃과 함께하는 여름 놀이는 더위와 갖가지 일거리로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씻고자 하는 휴가였다. 그러기 위해선 삶의 각도를 잠시나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벼 심는 논을 넓혀서라도 연밭을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연꽃을 감상할 자격이 있다고 했다. 쌀 몇 말보다는 연꽃을 즐기며 얻는 정신적 자유를 더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몰 연대가 불분명한 충막(冲邈) 선사는 ‘연못의 연잎만으로도 옷은 넉넉하다(一池荷葉衣無盡)’고 맞장구를 쳤던 것이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사랑이 대세인 시절에도 송나라 주돈이(周敦頤·1017~1073)는 연꽃을 사랑하노라고 공공연히 외쳤다. 좋아하는 이유까지 열거했다. 진흙 펄에서 나왔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出於泥而不染] 좋아했고 맑은 물에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아[濯淸漣而不妖] 좋아했다. 멀리 있을수록 향기가 더 진한지라[香遠益淸)] 좋아했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可遠觀而]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不可褻翫焉]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좋아했다. 군자 같은 꽃[蓮花之君子也[인지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줄거리로 ‘애련설(愛蓮說)’이라는 불후의 작품까지 남겼다.

애련설의 미학에 공감하고자 아침 일찍 종로 조계사 마당으로 향했다. 관람객으로서 ‘나를 깨우는 연꽃향기전’에 참여했다. 연못이 아닌지라 조각배 대신 신발을 타고 걸었다. 이왕이면 배를 닮은 나막신(나무로 만든 신발)이었다면 더 그럴듯할 뻔했다. 노 젓는 광경을 상상하며 연꽃 화분 사잇길을 수로(水路)인 양 천천히 걸었다. 연꽃을 제대로 즐기고자 눈과 코와 귀는 최대화했다. 손에는 또 다른 감각기관인 휴대폰 카메라를 장착했다. 때 묻지 않은 자태는 물론 향기까지 오래오래 담아두는 사진 상자다.

이제는 자연이 만든 낮고 습한 펄이 아니라 굵은 모래를 덮은 건조한 맨땅에서도 연꽃을 피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꽃필 때를 맞추어 나들이했지만 지금은 꽃이 사람 올 때를 맞추어 피어야 하는 시대다. 사람이 연꽃을 찾아 연못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연꽃이 사람을 찾아 절집 마당으로 왔기 때문이다. 대형 화분 몇 백 개에 담긴 연꽃은 7~8월 동안 봉오리가 돋고 꽃이 피고 연밥[蓮實·열매]이 맺히는 기승전결의 전 과정을 한 무대처럼 하루하루 동시 연출했다. 왜냐하면 구경 오는 날이 만개하는 날이기를 바라는 상련(賞蓮·연꽃 감상) 인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꽃들도 그 나름의 노력을 보탠 덕분이다. 그래서 도심 연꽃 축제는 여름 내내 매일매일이 절정일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