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흘 전에 사온 아보카도에 반점이 생겨버렸다. 부드러운 과육을 버터처럼 토스트에 얹어 핑크 소금과 후추에 고수를 얹어 먹으려 다 준비해뒀는데. 어제 먹었으면 완벽했을 아보카도는, 게으름 부린 단 하루 새 쓴맛 나는 검은 반점을 속살 가득 품고 나를 놀리듯 바라본다. ‘아, 어제저녁에 배달 음식 말고 이거 먹을걸!’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 교활한 과일은 겉으로는 상태를 알기 어렵다. 조금만 일찍 까도 떫고, 조금만 늦게 까면 쓰다. 그야말로 ‘완벽히 적당한’ 24시간 남짓의 기회의 창을 포착해야 그 ‘크리미’하고 향긋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일러스트=김하경

숙성의 시간이 중요한 아보카도, 바나나, 망고 같은 식재료가 아니더라도, ‘적당하다’는 말은 내게 수수께끼다. 적당히 떠들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노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만큼 ‘적당히’ 하는 것 같은데, 보편적 시선으로 볼 때는 아마도 ‘투 머치(too much)’인 모양이다. ‘너무 급하다’ ‘극단적이다’ ‘적당히 해라’ 같은 말을 한 주에 서너 번은 듣는다. 한번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면 양 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전진하는 내게 ‘적당히’라는 부사는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적당한 에너지를 쏟아넣으면 적당한 결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때면, ‘너무 많이 말고, 너무 적게 말고’라고 말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와 불과 열 살 정도 차이인 ‘Z세대’ 아이들은 특히 ‘균형을 맞춘다’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타고난 것 같다. 과한 열정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세대라고 해야 할까. 열과 성을 다한다고 결과가 꼭 좋은 건 아니라는 진리를 이미 알고 태어난 것 같다. 지나친 스트레스에 민감하고, 똑똑한 해결책을 찾는 것에 특화돼 있으며, 기성세대의 권위, 제도, 체계에 도전하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이 아이들과 이야기하다가 약간의 ‘멘털 붕괴’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반복 훈련의 중요성을 이들이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물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고전 음악은 수련 방법 또한 고전적이다. 시간이나 노력을 줄이며 실력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은 거의 없다. 아주 작은 근육, 힘줄, 뼈를 움직여 소리를 만드는 기악 분야에서 연습의 깊이와 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 번쯤은 ‘미쳤다’ 소리를 들을 만큼 내 악기에 깊이 집중해야 어느 정도 자기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어찌 보면 기악 수련이야말로 가장 ‘적당히’ 해나가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1만 시간의 법칙’ 운운해봤자, 꾸역꾸역 시간만 채웠다면 성과가 없을 수 있다. 내 몸과 소리, 몇백 년 걸쳐 내려온 텍스트인 악보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이 없다면 아무리 긴 시간 반복 수련해도 결과는 미미하리라고 장담한다. 관찰하고 탐구하며, 미세한 움직임과 차이에도 집중해야 하는 것이 음악 수련이다. 반복 수련과 관찰하는 탐구, 이 두 가지가 ‘적당한’ 균형을 이루어야 창의적 돌파구 또한 기대해볼 수 있겠다.

나 역시 계속해서 그놈의 ‘적당히’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적당히’를 핑계 삼는 게으른 어른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과한 노력을 강조하는 꼰대가 되는 것도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혹여 죽기 전까지 ‘적당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상을 마음에 품고 현실적으로 사는 것과 현실만 바라보며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삶 아니겠는가. 이루지 못할 꿈도 계속 꿀 수는 있으니까.

혹시 아는가. 언젠가 아보카도가 완벽하게 익은 순간을 분별하는 마법 같은 투시력을 갖게 될지. 그런 날이 온다면 성대한 파티를 열어 모두에게 아보카도 토스트를 대접하고 싶다. 아주 스페셜하게, 수란까지 얹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