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에 대한 외신 보도를 읽다가 ‘데스봇(deathbot)’이라는 표현을 접했다. 죽음을 뜻하는 ‘데스(death)’와 자동 프로그램 ‘봇(bot)’의 합성어인 데스봇은 AI로 망자(亡者)의 생전 모습을 재현하는 서비스다. 말하자면 ‘AI 환생’인 셈이다.
본문에 들어 있는 링크를 누를 때마다 데스봇의 개발 현황이나 시장 전망 따위를 소개한 여러 매체의 기사가 나왔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가 흠칫했다. 그 링크는 기사가 아니라 실제 데스봇 서비스 업체의 사이트로 연결돼 있었다. “또 다른 자아를 만드세요. 두 번 사세요(Build Your Second Self. Live Twice).” 첫 화면에 이런 홍보 문구와 함께 “당신의 음성, 가치관, 존재감을 포착해 AI 자아를 형성하고 성장시키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연결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는 설명이 나와 있었다.
문학을 담당하던 3년 전에 비슷한 상상력의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다. 켄 리우의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본심’. 데스봇 자체가 생소하진 않다. 다만 그때만 해도 문학적 상상에 가까웠던 영생(永生)이 이제 인터넷에서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는 사실, 그 속도감에 아득해졌다.
이달 초 BBC는 이런 디지털 사후 세계를 연구하는 영국 카디프대 제니 키드 박사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짓는 옛사람들 사진이 소셜미디어에서 늘어나는 모습을 보며 이 주제에 흥미를 갖게 됐고, 자신의 데이터로 직접 데스봇을 만들어 봤다고 한다. 자신과 달리 ‘호주 사람 같은 억양’으로 말하는 데스봇에 위화감을 느낀 그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해 많은 의식과 전통을 갖고 있다. 이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장 수요가 크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자와 소통하려는 산 자의 열망은 유구하다. 인공지능은 강령술 같은 컬트적 전통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비록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해도 한 인간의 내면을 학습하는 기술은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지금 데스봇은 화면 안에 있지만, 머지않아 피지컬 AI 기술이 고도화되면 육신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이 말하는 존재는 생전의 그 사람일까. 그런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데스봇과의 ‘소통’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키드 박사는 “내 이미지가 계속 변한다거나, (데스봇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해서 사람들이 나와 내 가치관에 대해 가진 실제 기억이 왜곡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엇을 ‘실제’의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초보적 단계의 데스봇은 사실 지금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역사 인물이나 세상 떠난 연예인의 모습을 AI로 구현했다는 소식은 이제 새롭지 않다. 유튜브에선 유명을 달리한 스포츠 스타나 영화배우들이 왕년의 자신과 악수하고 셀카를 찍는 영상이 높은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된 데스봇이 대중에게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묻게 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문제를 둘러싼 법적 장치나 도덕적 공감대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비교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이 유한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뿐이다. 기사의 링크를 타고 들어간 데스봇 서비스 사이트엔 “시작은 무료”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차마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