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배우 박정민을 인터뷰할 때만 해도 그는 조연급이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한 시간이 흐른 뒤, 그도 달라졌다. 주연급 배우가 된 것은 물론, 올 한 해 가장 사랑받는 배우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를 성장시킨 원동력을 최근에야 알았다. 지난 18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나를 키운 건 부끄러움”이라며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일곱 번 반복했다.(본지 2025년 12월 19일 A20면) 부끄러움을 잘 느끼는 그는 연기도 글쓰기도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덜 부끄럽기 위해서다. 오죽하면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겨울호에 실린 박정민의 수필 제목도 ‘수치심의 역사’일까.
평생 부끄러울 짓을 한 번도 안 하고 살면 좋으련만, 오욕칠정을 가진 인간에겐 버거운 삶이다. 그래서 맹자는 본성 4덕인 인·의·예·지 중 의(義)의 단서를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 했다. 그 마음은 짐승과 구별되는 사람다움이라고도 했다. 지난 4월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 초 출간한 자서전 ‘희망’에 따르면 그의 인격 성장을 도운 것도 ‘부끄러움’이었다. “여느 소년과 다를 바 없는 성장 과정을 겪으며 주님으로부터 경험한 가장 큰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치심”이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강하다. 스타 배우도, 교황도 키워낼 힘이 있다. 하지만 제살을 깎아내야 하는 고통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에 외면받는다. 부끄러운 짓은 꽁꽁 숨겨야 할 것이 된다. 그걸 찾아내서 들춰내는 게 언론의 역할 중 하나다. 필부의 주먹다짐이나 불륜 같은 류의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 힘 있고 돈 있는 자, 즉 권력의 부끄러운 짓을 밝혀내는 것이다. 물론 언론 보도로 문제의 당사자가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올해만 해도 신문에 연일 부끄러운 짓이 나왔지만, 부끄러움은 당사자가 아닌 독자 몫이었다. 맹자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도 아닌 이들이다.
독자들의 부끄러움을 걱정해서 그랬을까. 일부 권력자들은 권력의 부끄러운 짓을 밝히기 어렵게 만드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과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 개정안은 허위·조작 정보 규제를 명분으로 언론 보도의 징벌적 손해배상과 강화된 정정·반론 의무를 도입·확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규제의 칼날이 허위 정보의 주요 확산 경로인 소셜미디어·유튜브 등 플랫폼 영역보다 법적 분쟁에 취약한 언론사의 고발·비판 보도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은 규제 도구는 권력자가 법적 부담을 앞세워 언론을 압박하는 전략적 소송으로 악용될 여지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언론사가 보도 이후의 위험을 우려해 사전에 논쟁적 보도를 자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헌법 제21조 제4항이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취지는 분명하다. 책임은 인정하되, 자유를 무력화할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으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들의 의도를 상상해 봤다. 평생토록 부끄러운 짓을 숨기고, 부끄러움을 모른 채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70년대 나온 박완서 작가의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화자는 탐욕, 허영, 가식에 가득 찬 인간 군상을 겪으면서 울부짖는다. 국어, 외국어, 수학 학원은 많은데 왜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느냐고. 50년 전 나온 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부끄러운 짓을 숨기기 급급한 세상에 부끄러움은 대체 어디서 배워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