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이 올해 국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지난 22일 누적 563만8000여 관객을 기록해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쳤다.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이 박스오피스 연간 1위를 차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다이쇼 시대 소년 검사(劍士)들 이야기다. 주인공 탄지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인 ‘혈귀’에게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여동생도 도깨비가 된다. 여동생을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탄지로는 도깨비 잡는 부대인 ‘귀살대’에 들어가 분투한다. 주인공이 동료들과 성장해 나가며 거악에 맞서는 플롯은 일본 소년 만화의 전형이다.
입체적 캐릭터는 이 작품의 매력으로 꼽힌다. 혈귀들은 비록 인간을 잡아먹는 악당이지만 저마다 사연이 있다. 인간 시절 겪은 가난과 차별, 가족 잃은 원통함은 도깨비가 되고 난 후 악행의 기제로 작용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이야기는 우리나라 공포물에서 접할 수 있는 한(恨)이라는 정서와도 닮아 있다. 주인공은 혈귀들의 안타까운 과거에 연민을 갖지만 심판을 미루지는 않는다. 그들이 사람을 해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행과 단죄’는 귀멸의 칼날의 뼈대를 구성하는 핵심 서사다.
주요 팬층은 2030세대다. 이들은 왜 일본 검사 이야기에 열광할까. 사람들은 만화나 소설, 영화 같은 가상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권선징악으로 압축되는 귀멸의 칼날의 교훈은 이런 점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른다는 단순한 메시지는 지금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고 착한 일을 하면 바보 취급 받는 시대 아닌가.
한국의 검사(檢事)들은 대장동 일당에 대한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범죄자들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범죄 수익 대부분을 챙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당은 동결된 자기 재산을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여권은 애써 피해액을 축소하고 “민사로 환수하면 된다”는 한가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대한민국에서 악당들은 처단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권의 비호를 받는다. 어디 대장동만 문제인가. 입시 비리, 개발 비리로 수사받은 정치인들은 열사 내지는 숭고한 피해자로 둔갑한 지 오래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 후원금을 횡령해도 국회의원 임기를 채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정의와 공정을 요구하는 청년들에겐 “능력주의에 찌든 극우”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정부 여당은 일부 정치 검사를 문제 삼아 사법 체계 전체를 흔든다. 문재인 정부가 검·경 수사권 조정을 강행한 이후 자본시장법 위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 주요 경제 범죄 사건의 1심 무죄율이 치솟았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 모양이다. 검찰 입건 마약 사범도 2020년 5974명에서 2023년 8342명으로 39.6%나 증가했다. 사기꾼과 마약 사범이 속출하는데 수사 지휘 공백으로 검찰과 경찰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피해자들은 탐정 역할을 해줄 변호사를 찾는 등 자력 구제에 나서고 있다.
검찰청 폐지로 국민적 피해가 커질 거라는 우려에도 정부 여당은 들은 체도 안 한다. 진영 논리라는 도깨비는 상식을 파괴하고 민생을 갉아먹는다. 범죄자는 비호받고 수사와 재판을 담당한 판검사는 모욕을 당하는 기이한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나라에서 권선징악이 제대로 실현되길 기대하는 건 욕심일까.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정의와 상식의 칼날’을 휘둘러줄 검사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