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역 고등학생 대표 19명이 지난 7월 부산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교학점제 재검토를 촉구했다. /뉴시스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지원청이 주관하는 청소년 정책 제안 강의를 다니다 보면 10대의 트렌드가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청소년들이 제안하는 정책에는 이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정책 소재는 해마다 유행을 타는 경향이 있다. 재작년엔 교권 침해 문제가 많이 제기됐다. 온라인 불법 도박도 종종 거론됐다. 요즘 화두는 단연 ‘고교 학점제’다. 전국적으로 적용되는 정책인 만큼 지역을 불문하고 많은 청소년이 큰 관심을 보인다.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얼마 전 서울 서대문에서 만난 한 중학생은 “어떻게 고1 때 진로를 결정하느냐”며 “전형적 탁상행정”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고교 학점제는 학생이 적성·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일정 학점을 따면 졸업하는 제도다. 대학 시스템을 고등학교로 당겨 온 것으로 보면 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제1호 교육 공약으로 2017년에 추진안이 마련됐고 올해 고1부터 전면 시행됐다. 준비 기간이 최장 8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인력과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볼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8월 5일에는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조국혁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교총·전교조·교사노조와 함께 고교 학점제로 인한 교육 현장 혼란 해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 어렵다는 좌우 대통합을 고교 학점제가 이뤄낸 셈이다. 이 문제는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핵심 쟁점이 되리라 전망된다.

현재 고교 학점제와 관련된 논란은 현실적 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낙제점을 맞은 학생들의 보충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며, 많은 과목을 수업하는 교사들 부담을 어떻게 줄이나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본질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교 1학년생이 진로를 결정하고 그에 맞춰 수업을 듣게 하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고교 학점제에선 고1 때 정하는 선택과목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대학과 관련 학과가 결정된다. 중간에 진로를 바꾸면 그만큼 불이익이 따른다. 대학에 가서도, 취업을 한 뒤에도 항상 고민되는 게 진로다. 심지어 대학은 다양한 학문을 탐색한 뒤 전공을 고르라며 자율 전공 학부를 늘리는 추세다. 그런데 그 전 단계인 고교에서 진로를 결정하고 스스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라니, 모순적이지 않은가.

진로 교육을 확대·강화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적을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진행되는 진로 교육이 가정 환경에 따른 격차를 보완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진로 결정을 강제하고, 그 과정이 입시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다른 이야기다. 1점 차로도 당락이 갈리는 게 대학 입시다. 이런 현실에서 ‘아빠의 재력’과 ‘엄마의 관심’을 등에 업고 진로를 치밀하게 설계한 학생이 경쟁력을 갖춘다는 건 과장된 우려일까. 한때 수시 전형이 3000가지에 육박해 복잡한 제도에 맞는 컨설팅을 제공하는 입시 업체들이 성행한 적이 있다. 그 전례에 비추어 보면 부모가 ‘관리한 꿈’도 스펙이 될 거라는 걱정은 기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7월 부산 지역 고등학생 19명이 부산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고교 학점제는 진로에 따라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야 하지만 학생이 과목을 선택하려면 단순한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며 “고교 학점제가 교육의 출발선을 아예 다르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덧붙여 “누구를 위한 제도냐”고 물었다. 교사도 학생도 반대하는 정책을 왜 추진하는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정책을 준비하는 데 들어간 매몰 비용이 아까워 강행하는 것만은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