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당국에 체포·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6명이 12일 무사히 인천공항에 내렸다. 긴박하게 흘러갔던 지난 일주일은 2007년 분당샘물교회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중국보다 미합중국이 더 두렵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것을, 수갑과 쇠사슬에 묶여 수용소로 연행되는 한인들 모습을 보며 절감했다. 이들에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지 않고, 향후 미국 입국에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인들을 가뒀던 미국 조지아주 수용소는 열악하기로 악명 높았다. 곰팡이와 녹으로 얼룩진 벽과 대소변이 넘치는 변기, 썩은 식자재가 널린 시설이라는 뉴스를 볼 때마다 꿉꿉한 악취가 절로 연상돼 괴로웠다. “합의문 발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한미 정상회담이었다”던 대통령실 발표가 불과 보름 전인데, 그 직후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정부가 500조원 돈 보따리를 풀겠다고 약속하면서 기업들 숙원인 비자 문제는 미국에 입도 못 뗐단 말인가. 수용소의 아비규환을 생각하며 진절머리 치다가, 지금 이 시각 수용소에 갇혀있는 또 다른 한인들을 떠올렸다. 헌법 제3조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임이 분명한,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된 북한군 포로 이모(26)씨와 백모(20)씨 얘기다.
이들을 지난 2월 우크라이나에서 직접 만났던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은 “과거 형무소였던 곳이 포로 수용소로 변해 각자 독방에 있는데, 냄새가 정말 지독했다”고 전했다. 엉망인 화장실에 환기도 안 돼 면담 내내 역한 냄새를 견디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귀순 의사도 밝혔으나 탄핵 정국을 거쳐 정권이 바뀐 한국과 러시아 파병을 공식 인정한 북한, 러·우 휴전 중재에 나선 미국이라는 급변한 외교 역학 속에서 근황을 알 수 없게 됐다.
사람을 지뢰밭에 밀어 넣고 폭사를 묵인하는 북한군 전술을 고려하면, 이씨와 백씨의 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되지 않고 자폭해 죽은 북한군 사연을 최근 조선중앙TV에 영웅담처럼 내보냈다. “적들의 포위에 들게 되자 서로 부둥켜안고 수류탄을 터뜨려 영용하게 자폭했다”는 윤정혁(20)·우위혁(19)이나, “자폭을 결심하고 수류탄을 터쳤으나 왼쪽 팔만 떨어져 나가자 오른손으로 다시 수류탄을 들어 머리에 대고 영용하게 자폭했다”는 리광은(22)이 대표적이다. 내 나라를 지키는 전쟁도 아니고, 남의 나라에 용병으로 끌려와서 “김정은 장군 만세!” 비명과 함께 수류탄을 자기 몸에 던지는 북한군은 80년 전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도 무릎 꿇릴 광기다.
김정은은 딸 주애를 이달 초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행사에 동행시켜 독재 정권의 ‘4대 세습’을 예고했다. 주애는 아직 초등학생 나이인데도 정장에 하이힐 또는 가죽 코트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나타나 어떻게든 어른 독재자 흉내를 내보려 애쓴다. 북한 당국은 ‘존귀하신 자제분’이라며 아사자가 속출하는 나라에서 유럽 명품 브랜드를 주렁주렁 걸친 주애 모습을 홍보하기 바쁘다.
존귀하신 자제분이라는 호칭은 해킹과 인신매매, 마약 밀매, 용병 공급 등으로 연명하는 독재자 집안에 가당찮은 수식어다. 지난겨울 쿠르스크 눈밭에서 살아남은 이씨와 백씨야말로 존귀하신 자제분이자 보호받아야 할 한국인이다. 취임 100일을 맞이한 이재명 대통령은 연일 사람 목숨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기업엔 서릿발을 내리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발 묶인 청년들의 안위엔 일언반구가 없었다. 이 대통령이 진정으로 인권을 소중히 여긴다면, 남북 간 신뢰 회복이 “망상이자 개꿈”이라는 김씨 일가가 아니라 두 청년을 향해 손을 내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