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들이 의대로 몰려 다른 학문이 위기라고들 하는데 우리나라도 각 분야에서 천재들이 등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한국 중고등학생들은 법률 사무소나 대학 연구소 등지에서 인턴으로 활약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 제1 저자로 논문을 등재하기도 했다. 학업으로 바쁜 와중에 봉사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범을 보였다. 청소년기부터 어려운 논문을 척척 썼으니 30대가 된 지금쯤 누군가는 불세출의 학자가 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인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입시 제도가 만든 ‘가짜 천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입 제도는 2000년대 들어 대전환을 맞는다. 수능 시험 중심의 정시가 줄고 내신과 비(非)교과 활동을 두루 살피는 수시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2002학년도 대입에서 정시와 수시 비율은 71.2대28.8이었다. 수능 성적으로 선발되는 정시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후 수시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2007학년도엔 비율이 역전됐다. 2018학년도부터는 3대7 이상으로 벌어졌다. 요즘은 수시로 뽑는 인원이 정시보다 4배 많다.
수시의 양상도 달라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수시 전형은 내신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학교 시험만 잘 보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주입식 암기 교육과 줄 세우기식 평가가 학생의 가정 환경이나 잠재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성적뿐 아니라 교내외 활동, 연구 성과 등 다양한 비교과 요소의 중요성이 확대됐다. 이를 제도화한 게 2000년대 후반 도입된 입학사정관제와 그 후신인 학생부 종합 전형(학종)이다. 이때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스펙’ 경쟁이 벌어졌다.
점수로는 드러나지 않는 학생의 꿈과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게 틀리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입학사정관제나 초기 학종은 이 문제에 안이하게 대응해 부모들이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넓혔다. 일부 사회 지도층은 자녀에게 남다른 이력을 만들어주려고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원을 노골적으로 동원했다. 자녀를 지인이 운영하는 기관에 인턴으로 채용시키는가 하면, 대학생도 소화하기 어려운 연구에 참여시킨 뒤 논문에 함께 이름을 올리도록 했다. 대치동 사교육이 입시 경쟁을 치르는 자녀에게 약간의 어드밴티지를 제공하는 수준이라면, 이건 자기 자식들만 특설 경기장에서 뛰게 하는 것과 같았다. 편법과 부정이 난무했던 그들의 ‘품앗이’는 2010년대 중·후반까지 유지됐다.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의 입시 비위에 비판이 쏟아지자,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관행일 뿐이었다”라고 맞섰다. 서류를 위조하는 범죄까지 관행이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몇 가지는 그렇게 변명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그것은 태어난 집에 따라 주어지는 기회마저 다른 한국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었고, 다양성·잠재성 등 멋진 단어들이 포장하고 있는 계층 세습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지난 15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18~29세의 50%, 30대의 62%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사면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 지지 성향이 강한 40대, 50대에서는 사면 반대 여론이 각각 36%, 35%였다. 흥미로운 건 20대보다 30대에서 반대 여론이 더 높았다는 사실이다. 30대는 평소 20대보다 이재명 대통령과 여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30대가 20대보다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건 이례적인 현상이다. 지금의 30대는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 대학 입시를 치른 이들이다. 조국 전 대표 사면이 그 시절 불공정한 수시를 경험했던 세대의 분노와 좌절감을 되살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