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사태 발생 전인 작년 11월의 일이다. 서울 서대문역 사거리에서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가 주최하는 집회가 열렸고 지방에서 올라온 고속버스 행렬이 인근 도로를 에워쌌다. 노조 조끼를 입은 집회 참가자들이 버스에서 하나둘씩 내리는데, 저마다 예쁜 글씨가 적힌 야구장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처음엔 ‘디올핑’이 나타나더니 ‘대파핑’ ‘알콜핑’ ‘격노핑’ ‘쩍벌핑’ 등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요즘 유아용 애니메이션 넘버원인 ‘티니핑’ 시리즈(캐릭터 종류가 100개 넘는다)에 프로야구 응원법을 섞는, 인기 대중문화를 정권 퇴진 시위 아이템으로 쓱싹쓱싹 치환해내는 인파와 마주하면서 “프로 데모꾼들은 클래스가 다르다”고 진심으로 탄복했다.

이들의 탁월한 풍자와 해학 능력이 이재명 정부에서도 발휘되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노조도 인권도 없는 나라를 만든 김정일을 조문하겠다고 방북 신청을 하면서 정작 북한이 죽인 천안함·연평도 장병 조문은 간 적 없는, 그래서 ‘종북핑’으로 보이는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고용노동부 장관이 되어서 그런지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면 핑핑핑 노래를 대신 불러보는 수밖에.

‘갑질핑’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지난 한 달간 여의도에선 모처럼 좌우가 아닌 상하의 대결이 펼쳐졌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좌진들은 한마음이었다. 이들은 수년간 매달려 법제화시킨 면직예고제 등 겨우겨우 일궈왔던 보좌진 권익 향상이 물거품될까 봐 두려워했다. 대통령실이 청문보고서 송부 재요청으로 임명 강행 의지를 드러내고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갑질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엄호하자 한 민주당 보좌관은 “저런 논리라면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는 주장도 말이 되는 것 아니냐”고 허탈해했다. 그 사이 병원·부처·수업 갑질 폭로가 연달아 터져 나와 장관 후보직에서 물러난 강 의원은 끝까지 보좌진에 대한 사과나 법적 대응 없다는 말을 안 했다. 많은 보좌진이 그의 사퇴 소식에 안도하면서도 눈빛은 흔들린 이유다.

갑질의 특징은 자행하는 본인이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선 강 의원을 넘어 민주당 전체가 갑질핑이기도 했다. 민주당은 “제발 협치하라”는 국민적 염원을 외면하고 윤석열 정부에서 탄핵안을 31번 발의하고 법안 단독 의결을 밥 먹듯 했다. 한 청문회에 증인·참고인을 25명 부르거나 사흘씩 진행하는 놀라운 집중력과 집요함도 보여줬다. 반면 이재명 정부에선 19명을 검증하는 데 증인·참고인을 통틀어 7명 채택했다. 이런 표변에 민주당은 유감 표명조차 한 적 없다.

배추밭과 출판기념회로 큰돈을 벌었다는 ‘배추핑’ 김민석 국무총리가 증인·참고인 0명 채택이라는 청문회 새 역사를 앞장서서 썼다. 이어 병적 증명서를 공개 안 하는 ‘방위핑’ 국방부 장관, 북한이 주적 아니라는 ‘태양광핑’ 통일부 장관 등이 줄줄이 등장하고, 이 대통령의 재판 변호인들이 ‘대납핑’이 되어 국정원 기조실장·법제처장 등 정부 요직을 꿰찼다. “이재명은 민족의 축복이자 구원자”라고 눈물짓던 ‘아부핑’이 누구보다도 정치적 중립성을 갖춰야 할 인사혁신처장이 된 것, ‘청담동 술자리 가짜 뉴스’ 유포 말고는 이렇다 할 의정 활동이 없던 ‘구라핑’이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임명된 것 역시 국민 눈높이에선 정권의 갑질이다.

정부·여당의 갑질을 견제해야 할 제1 야당 국민의힘은 육중한 ‘계엄핑’의 저주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의원들이 국민들 보기엔 별로 새롭지도 않은 혁신안조차 못 받아들이면서 유튜버 한 명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8·22 전당대회를 치른다 한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라의 앞날을 위해 이재명 정부의 무운을 빌 수밖에. 갑질핑은 떠나보냈지만, 남아있는 배추핑·아부핑·구라핑과 꼭 선정을 펼치길 바란다. 렛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