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아들이 올해 수도권 대학의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다. 아들은 축구를 워낙 좋아해서 구단이나 선수의 물리치료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왜 재수를 시키지 않느냐” “늦기 전에 재수를 준비하라”며 성화라고 한다. 그들은 재수를 해야 하는 갖가지 이유를 대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다. 더 좋은 대학에서 다른 전공을 가져야 ‘몸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인은 지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다는 명문 고교를 조기 졸업하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적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자식을 키웠다. 친구가 “너는 공부를 잘한 덕분에 안정적으로 사는데, 아들한테도 같은 걸 바라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들이 잘 살길 바라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가 좋아.”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부모라면 자녀가 사회에서 수요가 높거나 일정 수입을 안정적으로 벌어들이는 직업을 갖길 바란다. 지인도 그걸 원하기에 아들의 물리치료학과 진학에 반대하지 않았다. 테크 업계 최전선에서 일하는 그는 인공지능(AI)과 로봇을 동시에 접하고 있다. AI가 컴퓨터공학 전공 박사 논문을 몇 초 만에 정확하게 요약한 걸 보고 놀라면서도 인간의 신경과 근육이 로봇보다 얼마나 섬세하고 정밀한지도 새삼 깨닫는다.
그는 “내가 대기업에서 하고 있는 업무를 AI가 곧 대신할 순 있어도 아들이 하게 될 물리치료를 로봇이 그대로 해내는 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우리는 로봇이 두 다리로 하프 마라톤만 완주해도 박수를 치는 수준이다. 인간의 신체를 만지며 일대일로 교감해야 하는 물리치료에 로봇이 조만간 투입되긴 쉽지 않다. ‘몸을 쓰는 일’은 안정적이고 유망한 직업이 될 수 있다.
유명 벤처 투자자인 크리스 사카는 최근 팟캐스트에 나와 “(AI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래머, 변호사, 회계사 등 대부분의 사무직 근로자가 파멸할 것”이라는 절규 섞인 전망을 내놨다. AI를 한 시간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시험 점수를 받아야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의 업무 일부는 이미 AI가 대체하고 있다. ‘학습’이라면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게 바로 AI 아니던가.
AI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가 있는 반면, 더 가치가 높아질 일자리도 있으며 새로 생길 일자리도 있다. 세계경제포럼이 내놓은 ‘2025년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5년 동안 900만개의 일자리가 AI에 의해 대체될 예정이지만, 같은 기간 동안 AI 덕분에 약 11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난다. 그 일자리가 무엇이든, 지금과 같은 교육을 받고, ‘사농공’ 식의 가치로 진로를 정해선 먹고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벌써 그 전조가 보인다. 최근 본지 기사에 따르면 취업에 성공한 고졸 직장인이 늘어나는 반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들의 취업난이 장기화하면서 ‘고(高)학력=저(低)실업’이라는 오랜 공식이 깨지고 있다.(6월 17일 자 A2 면)
한 달 전, 이 자리에 쓴 글에서 AI로 인해 잃어버릴 일자리를 언급했다. 그 후로 주변 사람들과 “우리 애는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를 갖고 고민 상담 내지는 난상토론이 종종 벌어졌다. 수학을 더 가르쳐야 하나, 아니면 창의력 수업을 따로 받아야 하나. 결국 어떤 사교육을 더 시켜야 하는지를 다투는 자리가 됐다. 다들 챗GPT를 써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만약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이 주변에 있다면 미용사·요리사를 추천하겠다. 아무리 ‘멋진 신세계’가 온다 한들, 머리와 입맛을 AI나 로봇에게 맡기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