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항상 이겼다. 23전 23승. 그래서일까, 평소에도 툭하면 이순신을 불러대던 정치인들이 요즘 대선 판이 열리자 더 자주 이순신을 들먹인다. 열세인 보수 진영에선 이순신이 돌림노래다. 국민의힘에선 후보 강제 교체 무산으로 당이 뒤숭숭하자 “김문수 후보를 ‘이순신 대장선’처럼 따르자”고 독려하고, ‘하와이 특사단’은 “명량해전 12척을 모으는 심정”이라며 홍준표 전 대구시장을 설득하러 갔다. 후보들은 “충무공처럼 애국심으로 나라를 살리겠다(국민의힘 김문수)” “충무공의 기개로 맨 앞에서 싸우겠다(개혁신당 이준석)”고 외친다. 너도나도 이순신을 말하는 이런 무리 속에 윤석열 전 대통령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7일 국민의힘 탈당을 발표하면서 “자유와 주권 수호를 위해 백의종군할 것”이라고 했다. 원고지 4장짜리 입장문 어디에도 “죄송하다”는 말은 없었다. 백의종군(白衣從軍). 충무공을 상징하는 네 음절을 곱씹어봤다. 정치인들이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면 으레 하던 말이지만, 윤 전 대통령이 지금 말해도 될까. 이 말의 뿌리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항명(抗命)의 역사가 녹아 있는 까닭이다.

이순신 장군은 여진족 습격 방어 실패(1587년)와 조정의 왜군 공격 명령 거부(1597년)로 두 차례 백의종군했다. 익히 알려진 백의종군은 후자의 일이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부산에서 잡으라고 명했으나, 이순신은 그 정보가 속임수라고 판단해 따르지 않았고 한양으로 압송돼 고문받고 파직됐다. 후임인 원균은 선조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비축해놨던 수군과 판옥선·화포 등을 몰살시키고 패주했다. ‘명량의 12척’은 현실을 객관적·합리적이 아닌 당파적·이념적으로 해석한 자들이 불러일으킨 참사다. 돌아온 이순신이 그럼에도 기적을 썼을 뿐이다.

군명유소불수(君命有所不受·상황에 따라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라는 손자병법 어구가 있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오늘날엔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윤석열 정부에선 간언(諫言)하는 사람들이 항명으로 낙인찍혀 핍박당했다. ‘항명 수괴’로 찍혔던 박정훈 대령과 의사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군인들. 민주주의 국가라면 용납 못 할 12·3 비상계엄을, 대통령의 명령이라서 따랐던 군인들은 지금 수의(囚衣)를 입고 있다. 이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다. 초토화된 보수 진영을 향해서도 말이 없다. 다만 맛집을 찾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부정선거’ 영화를 볼 뿐이다. 이것이 백의종군인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이순신 타령을 성남시장 시절부터 애창곡으로 불렀고 이번 6·3 대선에서도 유세마다 빼놓지 않고 있다. 구국의 영웅 서사로 점철된, 이순신이라는 상징이 이 나라 백성에게 본능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뜨거움을 본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위증교사, 불법 송금 등으로 대표되는 대선 후보와 우리나라 호국의 상징을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을까.

게다가 최근 이 후보의 ‘커피 원가120원’ ‘호텔 노쇼 경제학’ ‘나라 빚지면 안 된다는 건 힘센 사람들 논리’ 발언을 보자. 철저하게 해류와 날씨를 따져 전술을 펼쳤던 충무공이 아니라 기껏해야 정략적 셈법과 갈라치기로 보위 사수에만 혈안이었던 선조의 모습이 아른거릴 뿐이다.

하지만 이 후보가 적나라한 민낯과 속내를 드러내는 말들을 마음껏 계속 쏟아내더라도, 6·3 대선 가도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영화관까지 친히 나와 백의종군하며 선거운동을 열심히 도와주는 ‘불멸의 윤순신’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