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갓 졸업하고 또래 친구들과 만났을 때, 화제의 8할은 직장이었다. 입사 1~2년 차인 이들 사이에선 부서나 팀의 허드렛일이 다 자기 몫이란 불만이 가장 많았다. 대학원 연구실의 석사생도, 가전 기업에 들어간 디자이너도, 대기업의 사내 변호사도 다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직장 생활을 갓 시작한 이들이 어찌 막중한 임무를 맡을 수 있겠으며 어떤 허드렛일은 업무를 배우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땐 맞았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나온 지 2년 만에 AI 에이전트가 등장했다. 사람의 일을 대신 해주는 비서 역할의 AI 서비스다. 요새 마주치는 사람마다 AI를 업무용으로 쓰냐고 물어봤다. 대리 이하 직원이나 대리, 과장까지는 일상적인 수준으로 쓴다고 했고, 부장이나 그 이상 임원일수록 사용 빈도가 점점 떨어졌다. 주로 이메일에 답장을 쓰고, 외국어 문서를 번역하거나 보고서를 요약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직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최근 ‘에이전트 보스’라는 개념을 내놨다. 인간이 하나 이상의 AI 에이전트를 관리하고 협업하는 업무 방식이 앞으로 보편화한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지시받은 일을 다시 시킬 수 있는 에이전트를 여럿 거느리는 것이다. 보스의 사전적 의미는 상사, 사장이다. 부서의 막내라도 에이전트에겐 상사가 될 수 있다. 허드렛일은 해방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상사가 되고, 대장이 되어라!
에이전트 보스를 내세워 노동자 해방의 꿈을 설파한 MS는 자사의 직원들부터 해방시켰다. 지난 13일 구조조정을 통해 전체 인력의 3%(약 6000명)를 감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메타도 지난 2월 전체 인력의 5%(약 3600명)를 해고했다. 이 소식을 전한 기사(본지 15일 자 B1면)에 따르면 AI를 업무 전반에 도입해 저성과자와 불필요한 관리 인력을 줄이고, 조직 내 중간 관리자를 AI로 대체하는 움직임도 뚜렷해지고 있다.
직장인은 에이전트 보스로 진화할 수 있다. 문제는 진화의 특성상 모두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화를 시도하려면 최소한 직장에는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이마저도 벌써 불안하다. 한 AI 전문가는 “대부분의 사용자는 단일 에이전트나 챗봇 수준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며 “에이전트 보스는 10개의 AI를 병렬로 활용해 혼자서 팀 단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라고 했다. 에이전트 보스가 한 자리 생기면 팀 하나는 없어져도 된다는 얘기다.
에이전트 보스가 되기 위해서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AI 결과를 최적화하기 위해 지시를 설계하는 기술), AI 평가, 에이전트 간 연결·설계 능력을 갖춰야 한다. 모두 ‘미래의 문해력’이라고 꼽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사고력, 문제 해결력, 전략 수립 능력까지 포함한다. 국가가 이런 AI 활용 역량을 키우지 않으면, 에이전트 보스는 소수가 독점할 수밖에 없다.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AI에 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한다. 그 돈을 들여 개발한 AI를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고, AI 교육과 일자리에는 어떤 식으로 투자할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100조원의 재원을 마련한다 한들, 이는 AI 에이전트를 파는 빅테크와 소수의 에이전트 보스의 몫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계에도 AI 바람이 불어 성경을 기반으로 훈련된 AI 챗봇 ‘바이블 챗’이 나왔다. “문신은 죄인가” 또는 “욕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머지않아 사제 구조조정도 생길 수 있다. 새 교황 레오 14세는 즉위 후 첫 주일 기도에서 AI 혁명의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의 기도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들 한 치 앞이 위태로운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