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파트너’로 부르며 대일 협력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며 “복합 위기와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거나 반성·사죄를 요구하지 않고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

과거 대통령들은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날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같은 표현을 쓰며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며 일본의 책임을 부각했다. 3·1절과 광복절마다 대체로 비슷한 기념사가 반복됐다. 이런 연설 뒤 한일 관계가 서먹해지고 과거사 문제도 더 꼬이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곤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한국 정치에선 여야를 막론하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반일(反日)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정해진 패턴이었다. 국익을 위해선 미국의 동맹이자 자유·시장경제 체제인 일본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계적으로 일본 때리기에 동조했다. 정치권 전체가 반일을 국내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에 유화적인 정치인에겐 ‘친일파’ ‘토착 왜구’라는 시대착오적 공격이 가해지곤 했다. 해방 후 두 세대가 훨씬 지난 지금 세상에 나라 팔아먹는 친일파가 어디 있나.

이제 한국도 선진국이다. 여러 분야에서 일본을 넘어섰다.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2020년에 이미 한국(4만3319달러)이 일본(4만1775달러)보다 높아졌다. 반도체·스마트폰 등의 IT 산업이나 조선·배터리·석유화학 등의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일본의 국민 메신저라는 ‘라인’도 네이버가 만든 것이다. ‘K웹툰’은 일본 ‘망가(만화)’의 아성을 무너트렸고, BTS와 ‘오징어게임’ 등으로 상징되는 K컬처는 일본의 문화 산업을 뛰어넘었다.

이런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일본 얘기만 나오면 적개심을 터트려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감정적 반일은 문재인 정부 시절 극에 달했다. 이전 정부에서 봉합했던 과거사 문제들을 헤집어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자초했고, ‘죽창가’ ‘노 재팬’ 같은 반일 선동을 부추겼다. 해방 직후 신생국에서 있었을 법한 일들이 21세기 선진국에서 벌어졌다.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는 결코 잊어서도, 덮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과거에 매몰돼 관성적으로 일본을 때리는 것은 국가 이익을 해치고 전략적 선택지를 스스로 제약하는 일이다. 한국은 이제 과거로 논쟁하는 나라의 수준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