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장관들을 대상으로 인지도 조사를 한다면, 비(非)정치인 출신 중에선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인 2020년, 질병관리본부장(현 질병관리청장)으로 거의 매일 상황 브리핑을 하며 ‘방역의 얼굴’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현재 유행 규모와 확산 속도는 역학조사, 검사, 격리 조치 등 방역 조치만으론 한계가 있다” 같은 정보를 숨김없이 전달하며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한국은 보건 당국의 노력과 일선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코로나 방역에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았다. 방역 책임자였던 정 장관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직접 타임지에 정 장관 소개 글을 보냈다. “그는 방역의 최전방에서 국민과 진솔하게 소통하며 K방역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성실성이야말로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와 맞서는 수많은 ‘정은경’들에게, 그리고 인류 모두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를 보건복지부 장관에 발탁하며 “감염병 위기 속에서 매일 직접 언론 브리핑에 나서 국민 이해와 협조를 이끌어냈다”고 했다. 방역 상황을 지휘하며 국민이 안전한 일상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지난달 23일 감사원이 공개한 ‘코로나19 대응 실태 진단 및 분석’ 감사 결과 보고서로 ‘K방역’이 얼마나 관리가 허술했는지 드러났다. 곰팡이·머리카락 같은 이물질 발견이 신고된 코로나 백신과 같은 공정에서 만든 ‘동일 제조번호 백신’ 1420만회분이 국민에게 접종(2021~2024년)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됐다. 또 이물질 발견 사실을 백신 제조사에만 통보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는 알리지 않은 중대한 절차 위반도 확인됐다.
그런데도 코로나 방역 책임자였던 정 장관은 당일 관계 부처 합동 참고 자료에 ‘감사원 지적에 대해 관계 부처와 협력하여 개선하겠다’는 정도의 원론적 입장만 내놓았다. 국민이 기억하는 책임 있는 ‘방역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접 해명 요구가 빗발치자 정 장관은 감사 결과 공개 보름 만인 지난 11일에야 국회 보건복지위에 출석해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국민께 송구하고 책임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다”며 사과했다. 그는 “백신 원액을 제조하는 공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일 제조번호 백신에 모두 이물질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해명했을 뿐, 원인·책임 규명에 대해선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코로나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감사원도 이를 감안해 공무원 문책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 장관이나 보건 당국의 대처는 백신을 맞은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입증 여부를 떠나 ‘백신 후유증’을 호소하는 국민도 적지 않은 상태다.
최소한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국민에게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의 방역 정책에 따르는 것은 완벽한 무결성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라, 혹여 문제 발생 시 국가가 정직하게 알려주고 책임질 것이란 신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이 방역 당국에 보내준 신뢰가 코로나 대응에 큰 힘이다.” “불신이 있으면 심리적 방역에 실패해 방역 자체가 어려워진다. 국민적 갈등도 불필요하게 많아진다.” 정 장관이 코로나 팬데믹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스스로 했던 말들이다. 신뢰는 한번 허물어지면 회복이 어렵다. ‘방역 영웅’이라는 칭송은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진실과 책임이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후속 조치와 신뢰 회복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