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K컬처의 뿌리인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블록버스터급 세계 순회전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주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그는 45년 전 미국, 영국, 프랑스를 순회한 ‘한국미술 오천년전(展)’을 언급하며 “한국 미술이 서구권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된 전시다. 그때 규모로 다시 한번 열겠다”고 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대영박물관), 프랑스 기메박물관을 순회전 장소로 거명했다.
이 발언이 보도되자 소셜미디어가 달아올랐다. “국보를 싸들고 나가 국가 홍보를 하던 시절과 지금의 대한민국 위상이 같은가” “K유물을 보겠다고 외국인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몰려드는데 웬 쌍팔년도 감각이냐” “안목이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 등 날 선 비판이 쏟아졌다. 한 박물관 인사는 “국립박물관의 해외 특별전이 시대를 훑는 ‘통사(通史) 전시’에서 우리가 기획한 ‘주제 전시’로 방향을 바꾼 지 10년이 넘었다”며 “아웃바운드가 아니라 인바운드의 시대에, 보따리 장수처럼 국보를 들고 나간다는 발상부터 시대착오”라고 지적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미술 오천년전’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보스턴, 뉴욕, 워싱턴 등 8개 도시를 순회하고 1984~1985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3국을 돌며 우리 유물을 선보였다. 미국 순회전엔 국보 46점을 비롯해 354점, 유럽 전시엔 국보 43점과 보물 26점 등 334점이 출동했다. 당시 박물관 신문은 순회전 폐막 후 “대한민국이 매우 세련되고 훌륭한 전통문화를 가진 문화민족 국가임을 세계에 널리 과시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한국 미술이 선진국에 나가 인정받기를 갈구하던 시대는 끝났다. 유홍준 관장 말대로 “2005년 용산 개관 당시만 해도 관람객 100만명은 꿈의 숫자”였으나 2023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간 관람객은 418만명. 세계 박물관 6위에 해당한다. 어림잡아 100분의 1에 불과하던 45년 전과 달리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제 건물 규모나 관람객 수, 전체 운영 예산 모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브리티시 뮤지엄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한때 ‘우러러봤던’ 그 박물관들에서 먼저 찾아와 “한국 전시를 열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낼 정도다. 오는 11월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을 필두로 시카고미술관, 브리티시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도 그런 요청으로 성사됐다.
유 관장은 베스트셀러 인문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한국 미술 사학자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청장을 지낸 올드보이. 올해 대선 과정에선 이재명 후보 캠프의 K문화강국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오랜 꿈이던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돼 취임 사흘 만에 기자들을 만났을 땐 K문화강국에 대한 신선하고 장쾌한 계획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올드보이의 입에서 나온 구상은 실망스러웠다. 과거 회귀적 재탕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국보급 유물을 들고 해외로 나가는 것보다, 참신한 기획 전시로 외국인 관람객을 한 명이라도 더 국내로 끌어들이는 게 K문화강국의 기본 아닐까.
해외 전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K컬처를 내세우지 않으면 트렌디하지 않은 시대다. 한국 문화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어느 때보다 많은 만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브리티시 뮤지엄에서 고품격 주제 전시를 선보이고 그들의 컬렉션을 빌려와 안방에서 보여주는 교환전도 훌륭한 메뉴다. 올드보이라도 아이디어는 신선해야 한다. 어떤 주제를 어떤 유물로 꿰고 엮어 K컬처의 뿌리를 보여줄 것인가. 답은 디테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