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건 외교가의 오랜 속설이다. 당장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정상회담은 의제와 발언 수위·표현은 물론 세세한 일정·동선까지 미리 조율한 뒤 진행된다. 준비 과정에서 실무자들끼리 얼굴 붉히고 언성 높일 순 있지만, 정상들은 완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하고 합의문에 도장을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외교관들은 어떤 경우라도 대단한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포장하는 데 달인들이다.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첫 방미 때 외교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외국 정상 부부에게 환영 만찬을 베푼 것은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 직전에 모디 인도 총리의 백악관 만찬이 있었지만, “모디 총리는 혼자였고, 부부 동반 만찬은 우리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이전 정부 때도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미·일 관계를 ‘코너스톤'(기둥을 떠받치는 주춧돌), 한·미 관계를 ‘린치핀’(바퀴 축에 꽂는 핀)에 비유했는데, 당시 외교부는 “코너스톤은 네 모퉁이에 있는 것 중 한 개이지만, 린치핀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상위 표현”이라는 ‘창의적’ 해석을 내놓았다.
내일이면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바이든 백악관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은 스가 일본 총리에 이어 문 대통령이 두 번째다. 이번 회담도 ‘성공’이 예정돼 있다. 앞서 만난 청와대·외교부 관계자들은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외교 전문가이자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처럼 돌발 발언이나 막무가내 요구를 할 가능성은 없다. 핵심 동맹으로 환대하고 굳건한 양국 관계를 확인하는 발언이 나올 것이다. 당장 급한 코로나 백신 문제에서도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약식 햄버거 회동’을 한 스가 때와 달리 ‘바이든 백악관의 첫 정식 식사 대접’도 기대하는 분위기다.
모두 의미 있는 성과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닐 것이다. 특히 최대 안보 현안인 북핵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의 고질적인 아전인수 해석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북한 문제가 우리 희망과 달리 후순위로 밀려있다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미 언론에 따르면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북핵 문제는 바이든 행정부의 ‘난제(too hard) 폴더’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확률은 0%이기 때문에 지금 뭘 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 외교안보 정책에서 최우선순위는 단연 중국·러시아와의 ‘신(新)강대국 경쟁’(Renewed Great-Power Competition)이고, 로켓포가 오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아프가니스탄 철군에 따른 혼란, 이란 핵 문제 복귀 등이 발등의 불이다. 김정은이 당장 ICBM 발사 등 극단적 도발을 하지 않는다면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반면 문재인 정부에 북한 문제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문제다. 레임덕은 물론 내년 대선과 직결돼 있다. 북한이 한국을 패싱하고 미국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이번 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제재 완화 등 대북 유화 카드를 이끌어내는 데 모든 걸 걸었다. 양국 입장에는 이처럼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우리는 김정은을 다시 불러내 미·북, 남북 대화 쇼를 하는 게 먼저다. 이런 간극은 공동성명의 몇 마디 외교 수사(修辭)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밋빛 포장보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설명하며 미국과 공동의 해법을 찾아가는 길고 어려운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정상회담의 진짜 성공 여부는 그때 가서 판명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