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는 엿새 만에 30만 관객을 모았다. /뉴시스

지난 3일 개봉한 ‘미나리(Minari)’가 극장가로 봄기운을 실어왔다. 코로나를 뚫고 엿새 만에 30만 관객을 모았다. 미국 자본으로 만들었지만 한국어 대사가 80%에 이른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관객상부터 최근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89관왕을 차지하며 달려왔다. 이 마라톤의 결승점이 저만치 보인다. 4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몇몇 트로피를 가져갈 다크호스로 ‘미나리’가 꼽힌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족 이야기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때 마주하는 도전과 희망, 불안과 혼돈이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자전적 경험을 시나리오로 옮긴 정이삭 감독은 아메리칸 드림을 낙관적으로, 그러나 감상적이지 않게 그렸다. 미국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낯선 땅에 정착하느라 분투한 아버지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버지,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 지금 돌아보면 그들이 잃어버린 호시절이다. LA타임스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라고 했다.

영화 속 제이컵(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약속한다. 제이컵은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우물을 파고 밭을 갈고 농작물을 기르지만 땅은 너그럽지 않다. 병아리 감별사로도 일하는 그는 병아리 수컷을 왜 폐기하는지 묻는 아들에게 말한다. “맛이 없거든. 알도 낳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쓸모 있는 사람. ‘미나리’에선 할머니 냄새(grandma smell)가 물씬 나는 배우 윤여정이 그런 존재다. 보따리를 풀자 고춧가루와 멸치, 한약과 미나리 씨가 나온다. 할머니가 도착하자 가족에게 비로소 활기가 돈다. 감독들은 “난 그저 한 남자 앞에서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여자일 뿐이에요”(‘노팅힐’) “널 끊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어”(‘브로크백 마운틴’)처럼 대사 한 줄에 주제를 압축하곤 한다. ‘미나리’에서 할머니는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하다”는 지혜를 나눠준다.

팀 미나리(맨 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한예리, 스티븐 연, 윤여정,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정이삭 감독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생명력, 적응력의 상징이 미나리다. 할머니가 화투를 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담요 위의 ‘똥’과 ‘비’를 보여준다. 거름과 물, 농사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아닌가. 정이삭 감독은 부모님의 강인함에 경의를 표하고 딸에겐 선물이 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거는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다.

‘미나리’ 상영관에는 관객이 많다. 사랑받는 영화는 세상에서 무엇이 사라지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코로나 이전부터 어둡고 사회 비판적인 영화들로 기울어졌던 탓에 잃어버린 따스한 서정을 ‘미나리’가 되찾아준 셈이다. 일종의 균형 회복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올랐다. 마라톤을 즐기는 그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에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고 썼다.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치면, ‘힘들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어진 길을 달려 결승점에 도착하는 마라톤은 인생과 닮았다. 남보다 조금 빠르거나 느리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완주자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다. 은근과 끈기다. 아카데미 후보작은 오는 15일(한국 시각) 발표된다. ‘미나리’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다 해도 슬프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맙다. 한국인의 도전과 희망을 정직하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한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