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우리 절벽으로 가요.”
연극 제작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날, 그는 여러 달 혼신을 다해 준비했던 연극을 접었다. 아직 밤 9시 통금이 아니던 때였다. 그가 사는 평창동의 한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2차 얘기가 나올 쯤이었다. “에이, 무슨 절벽이에요.” 웃음으로 그 말을 받아 넘기며 평창동 어디쯤 절벽이 있던가 생각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위로하지.’
그 전날엔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 쯤인 거리 두기 강화 조치가 닥쳐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극장도 잡아 놨고 배우도 정해졌다. 곧 연습 들어가야 하는데, 연극의 운명은 사형수 목에 걸린 밧줄처럼 쉼 없이 널뛰는 코로나 확산 상황에 매여 있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룰 수 없었다. “관객 참여가 중요한 작품인데…, 어렵겠죠?” 그는 결국 공연 취소를 택했다.
다음 날 집에 혼자 있는 사진이 대화창에 올라왔다. 텅 빈 창문 옆 TV에 만화영화가 나왔다. 전화를 걸어 끼니는 챙겼는지 물었다. “그냥요…. 소주 맥주 한 병씩 마셨어요. 취하질 않네요.” 혼자 있게 할 수 없었다. “소고기 사드리겠다”고 그 동네 식당으로 불러냈다. 급히 원고를 마감한 한 연출가가 오고, 다른 평론가는 퇴근길 택시를 돌려 합류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절벽’을 말한 것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얘기로 웃고 있을 때 제작자가 말했다. “아, 모르시는구나. 북악산 밑 실내포차예요, 절벽.”
늦은 밤까지 ‘절벽’에서 술잔이 오갔다. 간판 앞에서 발그레한 얼굴로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이 고단한 시절도, 함께라면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날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는 올해 공연계를 진짜 절벽으로 내몰았다. 수많은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취소됐다. 개막한 공연도 예매 취소와 재예매, 공연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지금도 연극 ‘더 드레서’, 뮤지컬 ‘고스트’ ‘맨 오브 라만차’ 등 대형 공연들이 연말 혹은 연초까지 멈춰 있다. 공연은 대개 객석 점유율 약 70%를 손익분기점으로 놓고 설계된다. 거리 두기 2.5단계인 지금, 객석은 30% 이하로만 열 수 있다. 어떤 공연도 올릴수록 손해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연은 계속된다. 15일 저녁 연극 ‘연애는 반드시 망한다’를 공연 중인 신촌극장, 문 앞에 선 연출가가 핫팩으로 감싼 비접촉 체온계를 들고 ‘잠시 기다려달라’며 멋쩍게 웃었다. “체온계가 얼었나 봐요.” 계단에 간격을 띄워 다소곳이 줄 섰던 관객들이 한 명씩 극장에 들어갔다. 널찍이 거리를 둔 탓에 좌석은 열댓 개뿐. 연극 막바지 즈음 한 배우가 말했다. “건강히 버텨서, 내년에 다시 만나요!” 좋은 연극을 놓치지 않으려고 찾아온 관객들이 한 몸인듯 박수를 보냈다.
“저희 공연 다시 시작해요!” 엊그제 아침, 전화 너머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 제작사 대표의 목소리가 밝았다. 배우 이순재와 신구, ‘기생충’의 월드 스타 박소담 등이 출연하는 연극. 3일 개막했지만 관계자 중 확진자가 나와 이틀 만에 중단했다. 추가 확진은 없었고, 2주간 자가 격리를 거쳐 18일 공연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공연할수록 손해는 커질 텐데, 제작자는 뭐가 좋은지 자꾸만 웃었다. “배우들이 저만 괜찮으면 하겠대요. 그럼 당연히 해야죠!”
‘연극쟁이’들에겐 무대가 목숨이다. 이들이 서로의 온기로 얼어붙은 무대를 녹일 때, 여전히 그 무대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체온을 보탠다. 연극은 그렇게 이 겨울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