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홍 경제부 차장

‘정부가 다주택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다주택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갭투자를 규제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갭투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임대사업자를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임대사업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에게 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지인이 독일 마르틴 니묄러(1892~1984) 목사의 시(詩)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의 패러디 버전을 보내왔다. 올해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부담이 급증해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 1주택 실수요자끼리 돌려보는 글이라고 했다.

니묄러는 원래 히틀러를 지지했으나 나중에 반(反)나치 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8년간 수용소에 갇혔다. 초기 히틀러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과 노조, 유대인 등 나치 피해자들을 외면했던 잘못을 고해성사 형식의 시로 반성한 것이다. 이 시의 다른 제목은 ‘침묵의 대가’다.

패러디를 보낸 지인은 1주택자로,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우호적이었다. “우리나라 집값은 비정상적으로 높다. 반시장적 정책을 동원해서라도 다주택자 같은 투기 세력을 엄단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종부세 대상자가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다주택자를 겨냥한 징벌적 세금이 투기를 억제하기는커녕 전체 집값만 올리는 바람에 1주택 실수요자가 유탄을 맞은 것”이라고 했다.

투기 근절과 실수요자 보호는 역대 모든 정부가 공통적으로 내걸었던 원칙이자 목표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역대 정부는 수요 억제와 공급 확대라는 정책을 병행했다. 투기 근절을 위해서는 다주택자 보유세와 양도세 중과(重課)처럼 세금을 통한 수요억제책이 주로 동원됐다. 보금자리주택처럼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질 좋은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 대표적인 실수요자 보호책이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해 부동산 시장의 안정을 꾀한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주택 공급은 충분하다”(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는 말만 반복하며 3년 넘도록 제대로 된 공급 대책을 내놓지 않았고, 다주택자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만 골몰했다. 결국 ‘공급 없는 수요 억제’라는 무리수 때문에 수급 균형이 깨지면서 집값 상승세가 가속화됐고, 보호받아야 할 1주택 실수요자까지 세금 부담이 급증한 것이다. 현 정부 임기 중 집값 상승 폭이 역대 정부 중 가장 크다는 것은 여러 통계로 확인된다.

정부의 부동산 독주에 침묵한 대가는 ‘세금 폭탄’이었다. 집값이 많이 오른 서울의 경우 올해 재산세가 상한선(30%)까지 오른 가구가 57만6294가구로, 2017년(4만541곳)의 14배가 됐다. 서울시의 재산세액도 작년에 11% 오른 데 이어, 올해도 14.6% 증가했다. 종부세 대상자도 급증세다. 종부세 대상자는 박근혜 정부에서 6만명(27만→33만명) 늘었지만, 현 정부 3년간엔 18만명(33만→51만명) 증가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은 문재인 정부 초기 6억600만원에서 올해 9억2000만원으로 뛰었다. 앞으로 종부세 대상자가 폭증할 수 있다는 신호탄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투기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며 겨우 자기 집 하나 장만한 사람들이 정부 부동산 대책의 타깃이 되어야 합니까”라는 하소연이 줄을 잇는다. 한 청원자의 글이 핵심을 찌른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천정부지로 집값이 오르고, 덩달아 황당하게 공시지가 올리고 재산세 오르고 보유세 오르고. 저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징벌적 과세라뇨. 이게 제 잘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