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김진태 강원도지사 후보의 선거 공약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원주 유치’였다. 그는 “자나 깨나 삼성전자 생각뿐, 기승전 삼성전자”를 외쳤고 결국 당선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출신 부사장을 경제부지사로 영입하는 파격 인사도 했다. 반도체 업계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나리오’란 얘기가 많았지만, 정치권 위세에 눌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선거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후 그런 주장은 많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4년 만에 돌아온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곤 ‘삼성 반도체 호남 이전론’이 거세게 분다. 경기도 용인에 1000조원을 투입해 조성하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엉뚱하게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주장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운을 띄우자, 전북 등 지역 정치권이 득달같이 가세했다. 심지어 “내란 끝내려면 용인 삼성 반도체를 전북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마저 등장했다.
선거철마다 이런 주장이 반복되는 이유는 ‘삼성’이란 브랜드의 파급력 때문이다. ‘수도권 이기주의 타파’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지방 경제 활성화 명분을 살리는 데 삼성만큼 좋은 카드가 없다는 것이다. 첨단 반도체 라인 하나에 들어가는 돈이 최소 60조원 이상인 데다, 대규모 인재가 필요한 만큼 낙수 효과를 주장하기에도 좋다.
기업들도 지역 균형 발전 취지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반도체 공장 입지는 다른 문제다. 반도체는 전력도, 용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핵심이다.
요즘 반도체 업계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둘 다 붙으면, 하이닉스를 간다는 소위 ‘하떨삼(하이닉스 떨어지면 삼성)’이란 말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회사의 주력 반도체 공장이 있는 이천(하이닉스)과 평택(삼성전자)의 입지 때문이란 해석도 많다. ‘이천도 먼데, 평택은 너무 멀다’는 뜻이다. 강원도나 호남 유치 주장이 나올 때마다 반도체 업계가 침묵하는 가장 큰 이유다. 수도권에서 석박사급 인재가 가지 않으면, 현지에서라도 공급돼야 하는데 그런 교육 인프라 역시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미 주민 보상과 일부 공사가 진행 중인 반도체 산단을 통째로 옮기겠다는 황당한 주장이 난무하는데 정부는 어떤 ‘교통정리’도 하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의 반도체 총력전”을 외치던 대통령조차 이런 현실에 눈감는 듯하다.
반도체 기업들은 서슬 퍼런 정치권의 눈 밖에 날까 봐 제대로 반대 의견조차 내지 못한다. 분초를 다투는 글로벌 전쟁에서 경쟁력 손실은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다. 왜 한국 기업들은 지원을 받기는커녕 이런 정치적 발목 잡기를 감내하며 싸워야 하는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정치는 4류, 관료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수준’이라고 말한 것이 1995년이었다. 그 토로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한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