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거만했죠(Young and arrogant).”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달 30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에게 건넨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지포스 한국 출시 25주년’ 행사 무대에 오른 이 회장이 엔비디아의 ‘지포스 256’ GPU(그래픽 처리 장치)에 삼성 메모리가 들어갔다고 소개하던 때였다. 젠슨 황이 “내가 삼성 메모리를 썼을 때 너는 아직 어린아이(child)였어”라고 농담을 던지자, 멋쩍은 웃음을 짓다 이렇게 답한 것이다.
두 사람은 다섯 살 차이다. 지포스 256이 한국에 출시된 2000년, 젠슨 황은 창업 8년 차 서른일곱 살의 젊은 CEO였다. 당시 이 회장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 회장이 맥락에 없던 ‘거만하다’는 표현을 덧붙인 건 그동안 두 회사와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018년 젠슨 황이 비밀리에 삼성을 찾아 HBM(고대역폭 메모리) 개발과 파운드리 분야 협력을 확대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이재용 회장도 만나지 못한 채 거절당하고 돌아갔다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뿐이다. 처지가 달라진 지금, 삼성이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전한 배경에는 이런 과거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인 삼성은 오랜 기간 ‘갑(甲) 비즈니스’를 해 왔다. 전형적인 ‘을 비즈니스’인 파운드리를 할 때도, 1등 DNA를 전파하겠다며 메모리 출신 에이스들을 전면 배치했다. 삼성 파운드리가 시장에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 이유를 여기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젠슨 황이 이번에 이건희 회장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 처음 온 이유를 1996년 이건희 회장이 보낸 편지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이 회장이 본인의 비전을 밝히며 일면식도 없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그해, 젠슨 황은 사업 부진으로 100명이던 직원을 절반 이상 해고해야 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그런 그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고, 한국에 애정을 갖게 만든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란 사실에 잠깐 뿌듯해지지만 한편으론 지금 우리는 그런 경영가를 갖고 있는지 묻게 한다.
삼성은 우여곡절 끝에 엔비디아와 한배를 타게 됐다. 다만 이를 계기로 삼성과 손잡기를 원하는 전 세계 수많은 ‘미래의 엔비디아들’에게, 지금 삼성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봤으면 한다.
이번 무대는 이재용 회장이 대중 앞에 사실상 처음 선 자리였다. 많은 사람이 이 회장을 반가워하며 응원을 보냈다. 삼성 실적이 좋고 주가가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중과 친근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기를 바라는 갈망과 함께 ‘거만하지 않고 혁신하는 경영가’를 기대한다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