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정부 내에서 ‘나 홀로’ 주장하는 ‘평화적 두 국가론’은 말장난에 가깝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차용한 ‘남북기본협정’을 체결하겠다며 서독의 대(對)동독 정책이 두 국가론인 것처럼 말하는 건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서독은 기본조약 전문과 부속 문서(서한)에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했고 기본법(헌법)에도 1민족 1국가 원칙을 명시했다.
서독은 동독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눈감지 않았다. 서독은 1961년 동독 인접 지역에 설립한 인권침해 기록보관소를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도 통일될 때까지 약 30년간 운영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 언급을 회피하고, 북한 인권 업무·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나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독은 1민족 1국가, 1민족 2국가를 주장하다 1970년부터 2민족 2국가 정책으로 전환했다. 모두 아는 것처럼 이런 동독의 2국가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서독의 길인가, 동독의 길인가.
정 장관이 말하는 체제 존중, 국경 불가침 등 동서독 기본조약 내용은 이 조약을 본떠 남북이 1991년 타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이미 다 포함돼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로 돌아가자고 하면 될 일을,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하면서까지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다”는 북한과 ‘기본협정’을 체결하겠다며 두 국가론을 들고나온 건 패착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로 규정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모든 정부는 기본합의서상의 ‘남북 특수 관계론’에 입각해 대북·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정 장관의 “평화적 두 국가론이 특수 관계 속 두 국가론”이라는 설명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궤변이다. 특수 관계 자체가 나라와 나라 사이 관계로 보지 않는 접근인데 “특수 관계 속 두 국가론”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국민의힘 의원은 “솔직히 장관 설명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북한은 아마 더 황당할 것이다. 기본합의서든 기본협정이든 합의 사안을 지키지 않으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남북 간 합의 사항이 지켜지지 않은 게 문제지, 합의문이 없어서 남북 관계가 이 지경이 된 게 아니지 않은가.
급할수록 돌아가고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을 견지하는 게 남북 관계에도 예외일 수 없다. 대통령실은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며 선을 긋는다. 정 장관의 독주는 그 취지가 선의일지언정 대북·통일 정책에 대한 정부 내 ‘원 보이스(한목소리)’ 원칙까지 허물어가면서 지속할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차기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까. 정치인에게는 무플(무관심)보다 악플(악성 댓글)이 낫다지만, ‘정치인 정동영’보다는 대북·통일 정책 부처의 수장다운 모습을 기대한다.